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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최상영
작성일 2008/07/12 (토) 23:12
분 류 안맞다.
추천: 0  조회: 7895  
[신동아]월남전 포로 박성환님의 태권도 인생


한국판 빠삐용, 베트남전 포로 박정환의 격투 인생

‘실전 태권도’로 생지옥 포로생활 버티고 미국 무술계, 뒷골목 평정
● 베트콩 구정(舊正) 대공세 때 시가지 교전 중 생포
● 생지옥 포로수용소에서 태권도 시범으로 인기
● 北 강제송환 중 탈출, 캄보디아 국경 스파이 혐의 체포
● 캄보디아 군형무소 격투시합 제패해 재소자 장악
● 미 CIA, 한국 정부 개입으로 502일 만에 생환
● 가난 벗으려 미국행, 수의사에서 태권도 전도사로
● 합기도·유도 가미한 ‘실전 태권도’로 숱한 도전자 제압
● 全美동양무술대회에서 띠술·지팡이술, 손가락 송판 격파 시범
● ‘태권도 대부’ 최홍희 장군의 ‘북한 시범 동행’ 제안 거절


- 신동아 2008년 6월호 -        

베트남전은 오늘날 한국 사회의 중요한 논쟁거리인 해외파병의 원조다.
이 전쟁에 투입된 한국군은 8년간 연인원 32만명. 사망자는 5000명 안팎, 부상자는 1만명이 넘는 것으로 추산된다.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의 ‘통계로 본 베트남전쟁과 한국군’에 따르면
참전 한국군 중 3명이 포로가 됐다가 귀환했다. 장교가 한 명이고 병사가 2명이다.
반면 실종자는 모두 8명. 군당국은 이 중 3명을 순직 혹은 전사 처리했다.
나머지 5명 중 3명은 월북(越北), 한 명은 헬기 추락사, 한 명은 현지 탈영으로 추정한다.

  국방부 인정 첫 베트남전 포로 박정환(66)씨는 포로 3명 중 유일한 장교 출신이다. 1967년 10월 베트남전에 태권도 교관으로 파견될 당시 최연소 태권도 공인 5단이었다. 이듬해 1월 전투 중 베트콩에게 잡힌 그는 캄보디아 군형무소를 거쳐 1969년 6월 502일 만에 풀려났다. 한국에 돌아와 보니 병적기록부가 말소돼 있었다. 전사 처리된 것이다. 베트남전 사망자와 부상자는 있어도 포로나 실종자는 있을 수 없다는 군당국의 방침 때문이었다. 박씨의 귀환은 군당국이 베트남전 포로를 인정하는 계기가 됐다. 월북 포로 문제도 마찬가지다. 2000년 7월 박씨가 기자회견을 열어 “베트남전 당시 한국군 포로 상당수가 북한으로 끌려갔으며 이 중 9명이 생존해 있다”고 폭로할 때까지만 해도 이 문제는 일종의 금기였다. 박씨의 주장에 대해 “금시초문”이라고 부인하던 국방부는 뒤늦게 월북 포로의 존재를 인정하고 통계에 넣었다. 박씨의 주장은 미 CIA 문서에 근거한 것이지만, 자신의 체험과도 관련돼 있다. 월맹군에 의해 북한으로 강제 송환되던 도중 탈출을 시도한 전력이 있기 때문. 당시 그는 탈출에는 성공했지만 길을 잘못 들어 캄보디아 민병대에 체포돼 스파이 혐의로 기소됐다. 생지옥 같은 포로생활과 목숨을 건 탈출은 ‘한국판 빠삐용’이라 할 만하다. 그가 오랜 수감생활을 견딜 수 있었던 데는 무술 실력이 한몫했다. 베트콩 포로수용소와 캄보디아 군형무소에 갇혀 지낼 때 그는 태권도 시범과 실전 격투시합으로 인기를 끌었다. 포로 신분으로 베트콩과 재소자들에게 태권도를 가르치기도 했다. 군에 복귀한 지 2년 만인 1971년 중위로 전역한 박씨는 미국에 건너가 태권도 보급에 나섰다. 그가 뉴욕의 흑인 밀집지역에 태권도 도장을 차릴 때만 해도 미국인들에게 태권도라는 무술은 낯설었다. ‘코리안 가라데’라는 간판을 내걸고 출발한 그는 숱한 실전 대결을 치르며 태권도의 입지를 굳혔다. 현재 미국에서 그가 운영하는 태권도 도장은 20여 곳. 제자들이 차린 도장을 합하면 60여 곳에 이른다. 그 중 상당수는 미국인 제자들이 차린 것이다. 그동안 그가 길러낸 제자는 10만명이 넘는다고 한다. 특기할 점은 박씨가 태권도인이면서 합기도 고수라는 점. 그의 태권도 도장에는 합기도반이 따로 있다. 그가 베트콩 포로 시절 목숨을 건 격투 시합에서 한 번도 패하지 않은 것은 꺾고 밀치고 엎어뜨리는 합기도의 실전적 기술 덕분이기도 했다. 1995년 국기원 승단심사를 거쳐 태권도 9단에 오른 박씨는 미국 플로리다주 한인회장을 역임했다. 사업 목적으로 일시 귀국한 그를 만나 베트남전 비화와 미국 태권도 개척사를 들어봤다.




▼ 1부 - 베트남 정글에서
1966년 서울 이태원에 있는 육군본부 태권도 도장. 태권도 5단인 박정환 소위와 4단인 모 중위와의 겨루기(대련)가 시작됐다. 베트남에 파견할 태권도교관을 선발하는 시험이었다. 왼발을 앞으로 내놓은 중위가 뒷발로 돌려차기 공격을 시도했다. 박 소위는 가슴팍으로 날아오는 상대의 오른발을 왼팔로 가볍게 잡은 후 오른 다리로 상대의 왼 다리를 감아 당겨 메쳤다. 중위는 뒤로 벌렁 넘어졌다. 일어난 중위는 옆차기에 이어 또다시 돌려차기로 공격해왔다. 박 소위는 손으로 그의 오른 다리를 낚아 잡고는 오른 무릎으로 그의 복부를 강타한 후 안은 채 번쩍 들어 마룻바닥에 메쳤다. 넘어지면서 박 소위의 도복을 잡은 상대가 주먹으로 그의 왼쪽 눈두덩을 후려쳤다. 다시 마주 섰다. 박 소위는 앞발인 오른발로 밀어 옆차기 하는 척하며 공중으로 뛰어올라 360도 회전 옆차기로 상대의 복부를 가격했다. 뒤로 넘어진 상대는 누운 채 마룻바닥에 주욱 미끄러지더니 벽에 머리를 부딪힌 후 널브러졌다. 잠시 꼼짝도 하지 않았다. 심사관석에서 ‘그만’ 하는 구령이 떨어졌다. 병사 2명이 중위를 일으켜 밖으로 데리고 나갔다. 월남군 7사단에서 태권도 교관 실기시험은 3단계로 진행됐다. 1차는 형(型), 2차는 겨루기, 3차는 격파시험이었다. 1, 2단계를 월등한 기량으로 통과한 박 소위는 마지막 격파시험에서도 최고의 솜씨를 선보였다. 차돌보다도 더 단단하다는 붉은 벽돌을 참가자 중 유일하게 깨뜨린 것. 박 소위와 겨루기를 했던 중위는 이날 오후 구두시험 차례를 기다리다가 갑자기 쓰러져 병원으로 긴급 이송됐다. 박 소위의 발차기에 장기가 파열된 것이다. 중위는 수술을 받고 6개월간 입원했다. 물론 베트남행은 포기해야 했다. 1967년 10월15일 박 소위를 포함한 7명의 태권도 교관이 미군 수송기를 타고 베트남으로 날아갔다. 교관단은 주월사령부 직속이었다. 채명신 사령관은 신고를 받는 자리에서 “월남 여자 조심해라. 월남 여자한테 장가갈 생각은 아예 말라. 허락하지 않는다”고 농담을 건넸다. 박씨는 베트남에 왜 갔을까. “전쟁에 대한 호기심에다 경제적 목적이 있었지요. 물론 애국심도 있었지만요. 조국의 명령에 따라 누군가는 가서 싸워야 하는 전쟁이었습니다. 공산주의를 무찌른다는 생각도 있었고. 용병이라는 생각은 전혀 없었어요. 베트남에서 한국군이 가장 용맹하다는 자부심이 있었죠.” 박 소위가 베트남에서 받은 전투수당은 하루 4달러. 일제 카메라가 70원 하던 시절이었다. 이 돈은 한국 정부에서 나오는 게 아니라 미국이 주는 것이었다. 장교 전투수당을 월급으로 치면 한국에서 받던 급여의 15~20배에 달했다. 파월장병은 한국을 떠날 때 1년치 급여를 미리 받았다. 미군이 받는 전투수당은 한국군의 10배가 넘었다. 경북 영덕에서 태어난 박씨는 6남매의 맏이였다. 대구에서 중·고등학교를 다녔는데, 부친이 일찍 사망하는 바람에 소년가장 노릇을 했다. 경북대 수의학과를 졸업한 후 1966년 학도군사훈련단(ROTC·학생군사교육단의 전신) 소위로 임관할 당시 가족 모두 그만 바라보고 있었다. 독립유공자인 조부도 그해에 사망해 그가 집안에서 실질적인 가장이었다. “솔직히 베트남 갈 때 슬펐습니다. 내가 부자라면 참전할까 싶었죠. 당시 막내동생이 일곱 살이었는데, ‘형아, 텔레비전 꼭 사와’라고 부탁했어요. 막내가 손을 흔드는데 눈물이 날까 싶어 손도 안 흔들어줬습니다.” 박 소위의 근무지는 월남군 7사단 신병훈련소 내에 있는 태권도 교육장이었다. 7사단은 메콩강 유역의 미토시 외곽에 자리 잡고 있었다. 수도 사이공에서 승용차로 한 시간 반 거리였다. 박 소위의 임무는 7사단 예하 부대에서 차출된 월남군 장병들에게 6개월간 태권도를 가르쳐 그들이 부대로 복귀해 태권도를 보급하게 하는 것이었다. 아울러 인근에 있는 미 9사단 장병에게도 태권도를 가르쳤다.



베트콩 제자 덕분에 총살 면해
박씨에 따르면 베트남 남자에 비해 상대적으로 ‘체격이 좋고 잘생긴’ 한국군은 베트남 여자들에게 인기가 좋았다고 한다. “베트남 여인들이 돈을 벌기 위해 한국군을 많이 유혹했습니다. 자신의 맘에 들면 무작정 덤벼들곤 했습니다. 한창때인데 저라고 왜 욕구가 없었겠습니까. 하지만 순진한 시골촌놈인지라 겁이 나서 피했습니다. 연애해봐야 결과가 빤하다는 생각도 했고요. 여자에 대한 욕망을 참은 데는 기독교 모태신앙의 영향이 컸습니다. 그런데 만약 제게 베트남 여자가 있었다면 포로가 안 됐을지도 모릅니다.” 박 소위는 포로가 되기 직전 나이트클럽을 운영하는 란이라는 베트남 여인의 강한 유혹을 받았다. 베트콩의 공격으로 장교 남편을 잃은 미모의 과부였다. 설은 베트남에서도 큰 명절이다. 음력 정월 초하루인 1968년 1월30일 밤 박 소위는 란이 운영하는 바에서 그녀를 만났다. 그녀는 그날따라 그에게 자고 갈 것을 강권했다. “지금 가면 다시 못 볼 것 같은 불길한 예감이 든다”면서. 하지만 박 소위는 불안한 표정을 짓는 그녀를 뒤로한 채 “내일 아침에 다시 오겠다”며 술집을 나섰다. 이날 밤 그 유명한 베트콩의 구정(舊正) 대공세가 펼쳐졌고 미토시는 베트콩에게 함락됐다. 박 소위는 부대에서 자다가 요란한 폭음과 자동화기 소리에 놀라 잠이 깼다. 포탄이 비오듯 쏟아졌다. 다들 도망갔는지 부대가 텅 비어 있었다. 진지에서 홀로 기관총 방아쇠를 당기던 박 소위도 부대를 빠져나와 시내로 피했다. 미처 달아나지 못한 월남군 병사 몇 명과 함께 베트콩들과 시가전을 벌였으나 역부족이었다. 박 소위 일행은 시내 호텔로 몰렸다가 베트콩의 포로가 됐다. 포로 중에는 미 9사단에서 근무하던 발전기 기술자 김규식도 있었다. 월남군 포로는 모두 현장에서 총살됐지만, 박 소위는 후이라는 베트콩의 도움으로 목숨을 건졌다. 전향한 베트콩인 후이는 월남군에 몸담고 있을 때 박 소위에게 태권도를 배운 적이 있었다. 박 소위 덕분에 김규식도 덩달아 처형을 면했다. 이때부터 공동운명체가 된 두 사람은 포로생활도 탈출도 함께 했다. 나중에 캄보디아 군형무소에서도 같이 지냈고 한국행 비행기도 함께 탔다.
베트남 여인 음부에 꽂힌 죽창 박 소위와 김규식은 맨발에 두 손을 결박당한 채 3개월 동안 포로로 지냈다. 정글 속 베트콩 포로수용소는 임시 시설이었다. 미군기들이 자주 폭격을 했기 때문에 수시로 옮겨 다녀야 했다. 포로들은 한 줌의 밥과 한 그릇의 물만 먹고 온종일 행군해야 했다. 가시가 맨발에 박히고 돌부리에 걸려 쓰러지기 일쑤였다. 광활한 밀림과 평원, 늪지대를 밤낮으로 걸었다. 박 소위와 함께 끌려 다닌 수십명의 포로 중에는 미군과 월남군 외에 민간인도 많았다. 나중에 민간인은 대부분 석방됐고 전·현직 군인 포로만 남았다. 포로들은 매일 사상교육을 받았고 과거를 반성하고 앞으로 베트콩에게 충성을 다하겠다는 서약서를 써야 했다. 박 소위와 김규식은 탈출을 시도했다. 감시병들을 제압하고 포로수용소에서 빠져나오는 데까지는 성공했다. 하지만 맨발인 탓에 멀리 가지 못한 채 강가에서 잡혔다. 박 소위는 거의 죽다 살아날 정도로 지독한 구타와 고문을 당했다. 베트콩들은 쇠사슬에 묶인 그의 몸에 발길질과 몽둥이찜질을 했다. 담뱃불로 손가락을 지져대는가 하면 펜치로 손톱을 잡아 빼기도 했다. 그가 탈출과정에서 감시병인 베트콩 두 명을 발로 걷어차 각각 내장이 터지고 턱뼈가 부서지게 한 데 대한 응징이었다. 어느 날 박 소위는 포로수용소 소장의 지시에 따라 지역사령관과 40여 명의 베트콩, 10여 명의 포로 앞에서 태권도 시범을 했다. 돌을 손날로 깨뜨려 시선을 끈 다음 품세에 이어 병사 한 명을 불러내 호신술을 선보였다. 박 소위보다 체격이 큰 두 명이 모두 거꾸로 처박히자 박수가 쏟아졌다. 소장은 베트남 고유무술인 보비남 고수를 데려와 박 소위와 붙게 했다. 하지만 그도 박 소위의 상대가 못 됐다. 박 소위의 발차기에 여러 차례 얼굴을 얻어맞고 바닥에 뒹굴더니 손을 들었다. 시범이 있은 후 포로수용소장은 바나나를 제공하는 등 박 소위에게 잘 대해줬다. 감시병들도 태권도 동작을 흉내 내며 상냥하게 굴었다. 반면 감시는 더욱 강화됐다. 용변을 볼 때조차 감시병 3명이 따라붙어 총구를 겨눴다.



박 소위는 포로로 지내는 동안 한국군에 대한 베트콩의 엄청난 적개심을 엿볼 수 있었다. 월맹의 본거지인 하노이에서 파견 나온 정규군 대령 리쿠이는 “제네바협정에 따라 전쟁 포로 대우를 해달라”는 박 소위의 요구에 “한국 군대는 여자를 잡으면 산 채로 유방을 칼로 도려내고 죄 없는 양민을 무자비하게 학살한다. 너희도 국제법을 따르지 않는데 우리가 어째서 국제법에 따라 처우해야 하느냐”며 고함을 질렀다.
“한국군은 베트남 양민에게는 대민봉사로 호감을 얻었지만 베트콩에게는 잔인하게 대했습니다. 전쟁이란 게 그렇지 않습니까. 우리의 용맹은 적에게는 잔인함이죠.” 나중에 한국에 돌아온 뒤 박씨는 베트남전에 참전한 상급 장교의 집에서 베트남에서 찍었다는 천연색 슬라이드 사진을 환등기로 봤다. 그중에 발가벗겨진 젊은 여인의 두 팔을 나무기둥에 묶은 장면이 있었다. 여인의 음부에 대나무 창이 꽂혀 있었다. 상급 장교에 따르면 그 여자는 한국군 여러 명을 유인해서 죽인 악질 베트콩이었다. 그래서 자신의 지시로 “확실하게 보복했다”는 게 그의 설명이었다. “죽든지 북한으로 가든지” 박씨는 베트남에서 돌아온 후 태권도 사범으로 활동하다 나중에 교회 전도사로 변신한 한 참전용사한테 “생포한 여자 베트콩의 음부에 수류탄이나 작은 구경의 포탄을 삽입하고는 자동화기로 조준해 폭사시켰다”는 끔찍한 얘기를 듣기도 했다. 박씨에 따르면 한국군은 베트콩들에게 공포의 대상이었다. “한국군은 동료가 죽으면 무섭게 보복했습니다. 베트콩을 매달아놓고 대검으로 배를 찔러 철모로 피를 받기도 했지요. 베트콩들 사이에서는 한국군이 사람을 잡아먹는다는 소문까지 났습니다. 베트콩은 한국군을 겁내 웬만하면 정면 공격을 하지 않았어요. 월맹군 사령부에서 ‘한국군과는 직접 붙지 말라’고 지시했다고 들었습니다. 미군 특수부대가 해내지 못한 임무를 한국 해병대가 해결한 적도 있습니다.” 어느 날 월맹군사령부를 다녀온 리쿠이 대령이 박 소위에게 작전명령을 하달하듯 통보했다. “해방군이 너를 하노이를 거쳐 북한으로 보내기로 결정했으니 기뻐하라.” 그가 북한행을 거부하자 리쿠이 대령이 설득에 나섰다. “한국군이 월맹군 포로가 되면 죽음을 택하든지, 아니면 우리와 가장 절친한 동맹국인 북한에 가 선전물이 되든지 양자택일할 수밖에 없다. 미군 병사처럼 종전이 될 때까지 하노이 포로수용소에 감금했다가 석방하는 일은 절대 없다. 한국군은 미군의 대리전쟁을 하는 용병이기 때문이다. 한국 정부와는 어떤 협상도 하지 않을 것이다. 북조선이라는 참된 네 조국이 있는 것을 천만다행으로 여겨라.” 베트콩 부대는 박 소위와 김규식을 저수지 한가운데 있는 섬으로 옮겼다. 직경 10여 m의 작은 섬이었다. 이곳에서 두 사람은 몇 개월 만에 처음으로 ‘육식’을 했다. 토끼고기라고 해서 먹었는데 알고 보니 생쥐 고기였다. 구역질이 난 박 소위는 이후 육식을 거부했다. 두 사람은 매일 사상교육을 받았다. 리쿠이 대령은 자신을 공산주의자가 아닌 민족주의자로 소개했다. “베트콩은 우리로 치면 남로당 빨치산이고 월맹군은 북한군인 셈이죠. 월맹군 장교의 교육을 받으며 감동하기도 했습니다. 민족의식과 애국심이 대단했거든요. 그는 민족을 얘기하면서 눈물을 글썽이기도 했습니다. 공산주의 노선에 대해선 ‘해방전쟁을 하기 위한 수단’이라며 ‘외세를 추방해 베트남 민족의 해방과 통일을 쟁취하기 위해 공산주의를 민족주의에 접목했다’고 강조했습니다.” 민족의식이 강하기는 월남군도 마찬가지였다. “우리는 미군을 보면 벌벌 기었는데, 월남군 장교는 달랐어요. 미군 장성이 찾아왔는데도 낮잠 자는 시간이라며 밖에서 기다리게 할 정도였으니까요.”



탈출 성공했지만 길 잘못 들어
박씨의 분석으로는 베트남전쟁의 승패를 가른 결정적 요인은 양측의 애국심과 정신력의 차이였다. “대부분의 베트남 민중은 낮에는 농민이고 밤에는 베트콩이었어요. 미국을 제국주의 국가로 여겼습니다. 베트콩과 월맹군은 민족해방전쟁이라는 뚜렷한 신념이 있었습니다. 반면 월남 정부군은 전쟁에 대한 신념이 없고 정신적으로 나약하고 부패했습니다. 월남군 장교들과 얘기해보면 ‘국부(國父)는 (월맹 지도자인) 호치민’이라고 해요. ‘그럼 왜 싸우느냐’고 물으면 ‘내 직업이기 때문’이라는 겁니다. 또 ‘미군이 괜히 들어와 민족 간 전쟁을 일으켰다. 너희(한국군)는 불난 집에 부채질하고 있다’고 하더군요. 패망할 때 군복을 입고 자살한 충성스러운 장교도 있지만 대체로 정신력이 약한 편이었습니다. 미국도 꼭 이기려고 전쟁한 건 아닙니다. 미국이 참전한 건 중국의 개입에 따른 동남아의 공산화를 우려해서였습니다. 시간을 끌면서 중국을 협상 테이블로 끌어내려 했던 거죠.” 박 소위가 하노이로 출발하던 날 포로수용소는 미군 헬리콥터의 기총소사와 로켓탄에 불바다가 됐다. 남아 있던 베트콩과 포로 상당수가 죽었다. 박 소위 일행이 출발한 지 5분 뒤에 일어난 참화였다. 박 소위는 하노이에 도착하기 전 탈출하기로 결심했다. 반공이 신념인 한국군 장교로서 북한행은 죽기보다 받아들이기 힘든 일이었다. 월북 후 가족이 당할 고초를 생각해서라도 못할 짓이었다. “월맹군 대령은 저한테 ‘북한에 가면 귀순했다고 하라’고 권했어요. 그의 얘기로는 대위 한 명을 비롯해 여러 명의 한국군 장병이 월북했다는 겁니다. 이건 사실입니다. 훗날 내가 미국에서 CIA 파일을 통해 확인한 사람만 해도 20여 명이니까요. 한국 국방부는 인정하지 않지만. 국방부는 북에 끌려갔더라도 특별한 활동이 확인되지 않은 경우엔 실종이나 전사로 처리했습니다.” 그의 증언에 따르면 북한군도 베트남전에 참전했다고 한다. “월맹군은 공식적으로 북한군의 참전을 부인했습니다. 그렇지만 하노이에 가면 북한군 사망자의 무덤과 기념비가 있어요. 포로 시절 베트콩들한테 들은 얘기로는 북한군 참전은 사실이었습니다. ‘북한 고사포 부대가 우릴 도와주고 있다’고 하더군요. 또 나중에 캄보디아 감옥에 있을 때도 베트콩 죄수들한테 북한군 참전에 대한 얘기를 들었습니다.” 포로가 된 지 58일째인 1968년 3월28일. 박 소위 일행은 성역이라 불리는 ‘호치민 루트’에 접어들었다. 캄보디아 국경지대인 이곳은 월맹군의 우회 침입로였다. 당시 중립노선을 표방한 캄보디아는 미국은 물론 한국과도 국교를 단절한 상태였다. 4월2일 밤, 박 소위는 두 번째 탈출을 시도했다. 물론 김규식과 함께였다. 박 소위는 손날과 발차기로 두 명의 감시병을 쓰러뜨린 다음 탈취한 총검으로 그들의 가슴을 찔렀다. 곧 베트콩의 추격이 시작됐고 두 사람은 정신없이 뛰었다. 방향감각을 잃고 무작정 강둑길을 따라 걷다 보니 캄보디아의 한 촌락이 나타났다. 촌장은 사정을 듣고 난 뒤 “당신들은 한국으로 즉각 송환될 것”이라고 장담했다. 하지만 운명의 여신은 아직 그들의 편이 아니었다. 두 사람은 캄보디아 민병대를 거쳐 군사정보대로 넘겨졌다. 그곳에서 조사를 받은 후 수도 프놈펜에 있는 구치소에 수감됐다. 재소자들에게 태권도, 합기도 가르쳐 1968년 7월4일. 베트콩 포로가 된 지 155일째, 캄보디아 구치소에 수감된 지 86일째 되는 이날 박 소위와 김규식은 캄보디아 군형무소로 이감됐다. 스파이 혐의였다. 간첩활동을 하기 위해 일부러 캄보디아 영내로 잠입했다는 것이었다. 프놈펜에서 12㎞ 떨어진 군형무소는 두 개의 감방으로 나뉘어 있었다. 1호 감방엔 70여 명, 2호 감방엔 100여 명의 수감자가 복작거렸다. 박 소위와 김규식은 1호 감방에 배정됐다. 죄수복이 따로 없어 옷차림이 제각각이었다. 반찬으로는 토마토와 가물치를 넣고 끓인 국이 유일했다. 상수도 시설이 없어 밖에서 길어온 황톳물을 사용했다. 대부분의 수감자는 감방 안에서 웃통을 벗었고 팬티나 수건으로 주요 부위만 가렸다. 빈대가 많아 아침에 일어나면 첫 일과가 빈대잡기였다. 각자 누워 잠자는 마루청의 나무 판때기를 들고 밖으로 나가 땅바닥에 두들기면 판자 틈에 낀 빈대가 뚝뚝 떨어져 나왔다. 수감자들의 면면은 다양했다. 캄보디아의 공산세력인 크메르 루즈의 간부, 유고 대통령 티토 암살을 모의한 중국인 공산주의자, 국보급 보물을 도굴한 파계승, 월남군 장교와 부사관, 밀거래로 잡혀온 농부….


일요일엔 간수들이 입회한 상태에서 격투기 시합이 벌어졌다. 박 소위가 들어오기 전까지 챔피언으로 군림한 인물은 킥복싱 고수인 태국인이었다. 박 소위는 그를 제압한 데 이어 쿵푸를 하는 중국인까지 무릎 꿇려 최고의 싸움꾼으로 자리매김했다. 다리걸기와 눈 찌르기, 사타구니 치기 등 그의 싸움기술은 그야말로 실전적인 것이었다. 이후 여러 명의 재소자가 그에게 태권도와 합기도를 배웠다.
형무소에 수감된 지 133일째인 1968년 11월17일. 박 소위와 김규식은 재판을 받기 위해 캄보디아 법정에 섰다. 두 사람을 기소한 군검사는 이들이 한국 정부나 미 CIA의 밀명을 받고 캄보디아에 잠입한 공작원이라고 주장했다. 재판장은 공소사실을 인정해 징역 6년형을 선고했다. 그해 12월 박 소위는 작은 노트 조각과 담배 종이에 캄보디아 인접국인 라오스의 미국대사관에 구명을 요청하는 글을 썼다. 이를 출소하는 전직 월남군 장교 꺼에게 몰래 쥐어줬다. 수고비로 1500달러를 받을 수 있다는 박 소위의 말에 솔깃해진 꺼가 편지 전달을 약속했다. 꺼는 박 소위가 일러준 대로 신고 있는 양말 밑에 편지를 숨기고 출소했다. 1969년 4월 초 80여 명의 수감자가 탈옥을 모의했다. 이들 중 대표가 박 소위를 찾아와 선봉에 서달라고 부탁했다. 그러나 탈옥은 성공하지 못했다. 베트콩 출신 죄수의 밀고 탓이었다. 가담자들은 모두 가혹한 구타와 심문을 당했으며 징벌로 암(暗)감방에 갇혔다. 빵 한 조각과 물 한 모금이 식사의 전부였다. 박 소위는 며칠 만에 나왔으나 10여 명의 핵심 주동자는 2주간 갇혔다 나와 머리를 빡빡 깎였다. 사건에 연루된 수감자 대부분은 다른 감방으로 옮겨졌고 간수 10여 명이 증원되는 등 감시가 엄해졌다. 한 달 뒤 박 소위는 감방장의 허락을 받아 마케이라는 일본인 수감자와 격투시합을 벌였다. 몸집이 큰 마케이는 유도가 특기였다. 싸움은 싱겁게 끝났다. 마케이가 박 소위의 몸을 잡으려 달려들다 뒤돌아 옆차기 한 방에 침몰한 것. 배를 맞고 나뒹군 마케이는 한동안 일어나지 못했다. 다음날 마케이의 요청으로 박 소위가 발차기를 안 하는 조건으로 다시 붙었다. 하지만 합기도와 유도에 능한 박 소위는 몇 차례 마케이를 내동댕이쳐 끝내 항복을 받아냈다.
박정희 대통령의 친필 편지 6월4일 박 소위는 캄보디아 국영방송 뉴스를 듣다가 깜짝 놀랐다. 아나운서가 난데없이 ‘꼬오레 깡더봉(남한)’을 들먹였기 때문이다. ‘우리 주월 한국군이 캄보디아 영토 내에 진입한 것은 어떤 침략적인 의도가 있었던 게 아니다’라는 한국 정부의 공문을 캄보디아 정부가 접수했다는 내용이었다. 일주일쯤 지나 교도소장이 박 소위와 김규식을 불러내 ‘국가주석 시아누크 공의 특명’이라며 석방을 통보했다. 캄보디아 주재 호주대사관의 미국대표부가 남한으로 보내줄 것이라고 했다. 6월16일 형무소장은 박 소위와 김규식을 군검사에게 인계했고 군검사는 두 사람을 프놈펜에 있는 호주대사관으로 데리고 갔다. 베트콩 포로가 된 지 502일째 되는 날이었다. 미국대표부 윌리엄스 대령이 이들을 맞았다. 그는 CIA 요원이었다. 사정을 알고 보니 전직 월남군 장교 꺼가 목숨을 걸고 라오스대사관에 박 소위의 편지를 전달한 덕분이었다. 이 편지는 미 CIA를 거쳐 박정희 대통령에게 전달됐다. 이후 한미 양국이 외교채널을 동원해 석방교섭을 벌였다는 것이다. 윌리엄스 대령에 따르면 꺼는 박 소위가 ‘보증’한 대로 미측으로부터 1500달러를 받았다고 한다. 그는 박 소위에게 “당신은 한국에 돌아가면 영웅이 될 것”이라며 “미국에서라면 영화배우도 되고 백만장자도 될 수 있다”고 치켜세웠다. 박 소위와 김규식은 비행기를 타고 태국의 수도 방콕으로 이동했다. 한국대사관 김모 참사관이 공항에 나와 윌리엄스 대령으로부터 두 사람을 인계받았다. 김 참사는 중앙정보부 고위간부였다. 1969년 6월18일 박 소위 일행을 태운 홍콩발 CPA기가 김포공항에 안착했다. 진을 치고 있던 100여 명의 내외신 기자가 질문을 쏟아냈고 여기저기서 카메라 섬광이 터졌다. 박 소위와 김규식은 두 손을 높이 치켜들고 “대한민국 만세”를 외쳐댔다. 귀환한 박 소위는 육군병원으로 후송됐다. 건강 검진과 휴식이 목적이었지만, 돌아갈 부대가 없기 때문이기도 했다. 그가 억류돼 있는 동안 군당국이 그를 전사 처리하고 병적기록부를 말소한 탓이었다. 박 소위의 가족은 국방부의 배려로 서울 이태원에 있는 군인아파트에 살게 됐다. 정부와 군 고위층 인사들은 그의 귀환에 지대한 관심을 보였다. 정일권 총리를 비롯해 최규하 외무부 장관, 김계원 육군참모총장, 김재규 보안사령관이 그를 만나 격려했다. 박정희 대통령은 비서관을 숙소에 보내 위로했다. 비서관이 건네 준 대통령의 친필 편지를 읽으면서 그는 눈물을 줄줄 흘렸다. 그는 병원에 있으면서 뒤늦게 중위 계급장을 달았다. 502일간의 전투수당도 일시불로 받았다. 육군본부는 박 중위에게 베트남에 되돌아가 정훈장교를 해보지 않겠느냐고 타진했다. 하지만 그는 “건강이 너무 좋지 않아 쉬고 싶다”며 후방 근무를 요청했다. 대구에 있는 2군사령부 예하 5관구사령부가 새로운 임지였다. 이곳에서 그는 새벽엔 합기도 도장에, 저녁에는 태권도 도장에 다니며 무술 수련을 다시 시작했다. 특히 합기도는 창시자인 최용술 도주(道主)한테 직접 개인지도를 받았다. 1970년 봄 박 중위는 오랜만에 가족을 만나러 서울로 향했다. 그런데 이태원 군인아파트에 가보니 다른 장교의 가족이 살고 있는 게 아닌가. 상부에서는 그의 소속이 대구 2군사령부로 바뀌었기 때문에 군인아파트에서 퇴거 조치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배신감과 서운함에 그는 군을 떠날 결심을 했다. 전역을 신청하자 상부에서 허락하지 않았다. 몇 차례 올렸는데 매번 반려됐다. 이에 박 대통령에게 청원서를 올렸다. 곧바로 전역 조치가 이뤄졌다.



▼ 2부 - 아메리칸 태권도 드림
예비역 중위 박정환씨가 미국행 비행기에 오른 것은 1971년 11월11일. 이민 목적은 “돈을 벌기 위해서”였다. 집안의 가장으로 동생들 공부까지 책임져야 했는데 중위 월급으로는 도저히 감당할 수 없었다는 것이다. 취업이민이 가능했던 것은 수의사 자격증 덕분이었다. 그가 첫발을 내디딘 도시는 수도인 워싱턴 DC. 미국수의사협회장이 운영하는 가축병원에 취업해 수의사로 일했다. 하지만 6개월 후 그만뒀다. ‘본업’인 무도인의 길에 대한 갈망 때문이었다. 미국에 진출한 태권도 고수들 당시 워싱턴에는 미국 태권도 개척의 선구자라 할 만한 이준구씨가 운영하는 태권도 도장이 여러 개 있었다. “이준구 사범을 찾아가 태권도 사범으로 일하겠다며 도움을 요청하자 별로 반기지 않더군요. 당시 이 사범은 한국에서 건너온 노모, 공모 사범이 자신의 밑에 있다가 인근에 태권도 도장을 차린 것에 대해 강한 배신감을 갖고 있었습니다. 이후 한국 사람을 크게 경계했지요. 반면 김기황 사범은 저를 받아줬습니다. 창무관 출신으로 가라데 유단자인 이분은 진짜 무도인이었어요.” 박씨에 따르면 오늘날 미국 태권도계에서 가장 유명한 사람은 준리태권도협회를 창설한 이준구씨다. ‘준리’라고 하면 어디서든 알아준다고 한다. 미 정계 인사들에게 태권도 가르친 덕을 많이 본 것이다. 초창기 태권도는 미국에서 ‘코리안 가라데’라 불렸는데, 태권도라는 명칭을 처음 사용한 사람이 바로 이씨다. 준리 태권도는 정통 태권도, 즉 국기원에서 보급하는 태권도와는 차이가 있다. 품세도 다르고 정권 내지르는 방법도 다르다. 박씨는 이씨에 대해 “무도 자체보다는 사업으로 성공한 태권도인”이라고 평했다. 2000년 사망한 이행웅씨도 미 태권도 개척사의 한 귀퉁이를 차지하는 인물이다. 미국태권도협회(ATA) 창설자인 그도 독자적으로 태권도 형을 만들었다. 그의 위상과 영향력은 이준구씨에 미치지 못한다는 게 박씨의 평가다. 무덕관 창시자인 황기씨는 미국에 수박도를 전파했다. 수박도는 한국의 전통무예인 택견에 가라데, 쿵푸를 결합한 무술로 알려졌다. 황씨는 1950년대 후반 최홍희 장군이 태권도 통합을 주도할 때 “무술의 스포츠화를 우려한다”며 대한태권도협회에 참여하지 않았다. 황씨는 2002년 사망했다. 현재 아들 황현철씨가 세계수박도협회를 이끌고 있다. 미국에는 또 세계당수도협회가 있다. 무덕관 출신으로 황기씨의 제자인 신재철씨가 설립한 단체로 한때 미국에서 꽤 인기를 끌었다. 당수도의 모태는 가라데다. 그밖에 뉴욕에서 세계태권도협회를 창설한 손덕성씨가 있다. 청도관 초대 관장을 지낸 그의 태권도도 가라데와 유사하다는 평을 듣는다. 세계태권도협회는 올림픽 경기를 관장하는 세계태권도연맹(WTF)이나 북한 주도의 국제태권도연맹(ITF)과는 전혀 다른 단체다. 박씨 설명대로라면 미국 태권도의 주류는 한국이 주도하는 세계태권도연맹이고 극소수 도장에서만 국제태권도연맹 형을 가르친다. 1955년 가라데 유단자인 최홍희 장군이 태권도라는 명칭을 제정할 무렵 한국에는 당수도, 공수도, 수박도 등 비슷비슷한 무술이 난립했다. 1959년 최 장군이 창설한 대한태권도협회는 파벌 싸움으로 1961년 대한태수도협회로 이름이 바뀌었다. 이때 협회 창설을 주도한 9개 관(館)의 품세는 저마다 달랐다. 품세와 기술이 통일되는 데는 진통이 작지 않았다. 대한태수도협회는 1965년 다시 대한태권도협회로 개칭됐다. 흑인 쿵푸 사범의 도전 이처럼 민간의 태권도계가 혼란스러웠던 반면 군에는 최홍희 장군이 만든 창헌류가 단일 형으로 보급됐다. 창헌류는 최 장군이 창설한 국제태권도연맹의 표준형으로 자리 잡았다. 군 복무 시절 창헌류를 배운 박씨는 미국에서 도장을 개척하면서 세계태권도연맹이 인정하는 국기원 품세를 새로 익혔다. “1966년까지는 태권도의 한국형이란 게 없었어요. 다 일본형이었지요. 1950년대는 일본 쇼토관 형이 거의 유일한 품세였습니다. 저는 이것을 완벽하게 터득했기 때문에 뒷날 미국에서 일본인 사범의 문하생이 몰려와도 막힘없이 가르칠 수 있었습니다. 군에 가보니 최홍희 장군이 만든 형을 배우더군요. 천지, 단군, 도산, 원효…. 최홍희 형은 발차기가 아름답습니다. 반면 일본형은 손동작이 좋습니다. 나이 많은 사람이나 뚱뚱한 사람도 배우기 쉽다는 장점이 있죠. 1978년 제가 국기원 소속이 된 이후엔 도장에서 가르치는 형을 국기원 품세로 바꿨습니다.”


박씨는 1972년 ‘이왕이면 큰판에서 놀자’는 생각에 워싱턴에서 뉴욕으로 옮겨갔다. 도장을 개설한 곳은 퀸스의 흑인 밀집지역이었다. 위험을 무릅쓰고 흑인 동네를 찾은 것은 건물 임대료가 쌌기 때문이다. 한국으로 치면 달동네였다. 박씨는 수련생들을 태권도반과 합기도반으로 나눠 가르쳤다.
도장을 차린 지 석 달쯤 지나 인근에서 쿵푸 도장을 운영하는 흑인 사범 2명이 찾아와 겨루기를 제안했다. 지는 쪽이 도장 문을 닫고 떠난다는 비장한 조건이 내걸렸다. 승패는 쉽게 갈렸다. 먼저 나선 한 명이 박씨의 오른발 뒤돌려차기에 얼굴을 맞고 기절해버린 것이다. 입과 코에서 피가 콸콸 쏟아졌다. 잠시 후 정신을 차린 그는 동료에게 “내가 뭘로 맞았냐”고 물었다. 이후 약속대로 도장 문을 닫고 자신의 제자들을 박씨의 도장으로 보냈다. 그뿐 아니라 자신도 박씨의 제자가 돼 발차기와 합기도를 배웠다. 박씨는 “겨루기에서 한 번도 진 적이 없다”고 말했다. “상대가 나보다 덩치가 크고 힘이 센 경우 작전을 잘 짜야 합니다. 시간을 끌어 체력 저하를 유도하는 게 좋습니다. 그런데 상대의 눈빛이 흔들리면 초장에 끝내야 합니다. 시간을 끌면 상대가 자신감을 갖게 되거든요. 메치는 기술이 있어 실전에서 유리한 점도 있었습니다. 정신력에서도 앞섰죠. 상대는 재미로 붙지만, 저는 목숨 걸고 싸우니까요. 지면 국제미아가 될 수밖에 없으니.” 이 무렵 박씨는 거의 매일 밤마다 제자들과 실전 대련을 했다. 제자들 중에 아일랜드계의 제리 골이라는 격투기광이 있었다. 대학에서 범죄학을 전공한 그는 형사가 꿈이었다. 그래선지 권투, 유도, 일본의 권법 등 다양한 무술을 섭렵했다. 특히 권투를 잘해 세계미들급 통합챔피언의 스파링 파트너로 나선 적도 있었다. 태권도인들에게 발차기 배운 이소룡 스승인 박씨에게 한 수 가르쳐달라며 겨루기를 요청한 그는 접근전에서 권투 스타일로 박씨의 양 옆구리를 마구 두들겨댔다. 치명적 공격을 자제하던 박씨는 그의 마구잡이식 공격에 화가 나 어느 순간 족도(足刀)로 그의 양 무릎 안쪽을 동시에 걷어찼다. 무릎이 탈골된 그는 거의 혼절해 병원으로 실려 갔다. 1년 후 다시 찾아온 그는 수련을 재개해 태권도와 합기도 유단자가 됐다. 지금은 변호사로 활동하고 있다. 박씨의 무술은 매우 실전적이다. 합기도를 연마한 덕분이기도 하지만 무엇보다도 실전적인 태권도를 배웠기 때문이다. 그의 태권도 고향은 대구 충무관이다. 영남고 재학 시절 대구시 중·고등학교 학생태권도회 부장으로 이름을 떨친 그는 대학생이 된 후 충무관 수석사범이 됐다. 충무관은 오늘날의 이종격투기와 닮은 실전 겨루기로 유명했다. 태권도 경기를 보면 주먹 공격이 거의 없다. 하지만 충무관 겨루기에서는 주먹으로 상대의 복부를 힘껏 가격하고 안면도 가볍게 칠 수 있었다. 접근전에서 붙잡는 것은 물론 무릎과 팔꿈치 공격, 심지어 박치기에 발로 넘어뜨리는 것까지 허용됐다. 게다가 박씨는 유도를 3년간 배웠다. 거기에 합기도까지 가미했으니 누구와 붙어도 자신이 있었다. 미국에 건너갈 때 그는 태권도 5단에 합기도 6단이었다. “태권도에 대한 대표적인 비판이 실전에 약하다는 겁니다. 실제 싸움에는 별 도움이 안 된다는 얘기죠. 일부에서는 주먹공격이 없는 점을 들어 ‘캥거루 무술’이라고 비하하기도 합니다. 미국의 한 태권도대회에서 이런 일이 있었습니다. 판정시비가 생겨 한국인 유단자들이 1000명 이상의 미국 관중이 지켜보는 가운데 자기네끼리 치고받는 싸움을 벌였는데, 망신스럽기 짝이 없었죠. 태권도 5, 6단이라는 사람들이 아이들 싸움처럼 두 눈을 감고 마구잡이로 주먹을 휘둘렀던 겁니다. 태권도를 세계 최고의 무술로 알고 있는 그들의 미국인 제자들과 관중은 어리둥절했죠.” 잦은 판정 시비는 태권도에 대한 인식을 나쁘게 하는 주범이다. 미국이라고 예외가 아니다. 박씨는 “(미국에서) 올림픽 출전 선수 선발전을 치를 때 한국인 심판들이 승부를 조작하거나 엉터리 판정을 하는 걸 종종 봤다”고 개탄했다. 1970년대 뉴욕의 밤거리는 살벌했다. 베트남전에서 전사하는 군인보다 뉴욕의 밤거리에서 살해당하는 시민이 더 많다고 할 정도로 치안이 엉망이었다. 그런 만큼 뉴요커들은 호신술에 관심이 많았다. 때마침 브루스 리(이소룡) 영화가 인기를 끌면서 동양무술에 대한 호기심이 고조됐다. 박씨도 그 덕을 좀 봤다. 그에 따르면 이소룡은 영화 속 이미지와 달리 실제로는 키가 170㎝가 안 될 정도로 작은 체격이었다고 한다. “키가 이준구씨와 비슷했어요. 제가 173㎝인데 저하고 차이가 좀 났으니까요. 이소룡이 원래 발차기는 잘 못했어요. 옆차기는 이준구씨한테, 뒤돌려차기는 잭 황한테 배웠습니다. 제가 알기로는 이소룡이 이름난 무술 고수들과 실제로 시합을 한 적은 없어요. 무술대회에서 시범을 한 적은 있지만. 무술연기를 잘했던 거죠. 물론 실력도 있었습니다. 빠르긴 빨랐죠. 그런데 실력만 놓고 보면 척 노리스가 낫지 않았나 싶습니다. 주한미군 출신인 그는 무덕관 출신의 신재철씨에게 태권도를 배웠는데, 전미(全美)가라데대회를 비롯해 많은 무술시합에서 우승했습니다.” 실전 겨루기로 이름을 떨치면서 박씨의 도장은 날로 번창했다. 매사추세츠, 코네티컷, 메인 등 여러 주(州)에 지관(支館)이 개설됐다. 처음엔 대부분의 수련생이 흑인이었다. 하지만 점차 백인 제자가 늘더니 나중엔 흑인보다 많아졌다. 유명해진 만큼 생명의 위협을 받는 일도 종종 일어났다.


살해위협 피해 플로리다로 스페인계 푸에르토리코인들은 기질이 공격적이고 성격도 급했다. 한번은 덩치가 큰 푸에르토리코인이 자꾸 도장에 찾아와 시비를 걸었다. 박씨는 그를 완전히 굴복시키기 위해 그의 부인을 불러 대결을 참관하게 했다. 그는 아내 앞에서 면상과 복부를 차이고 도장바닥에 네 번이나 거꾸로 처박히는 수모를 당했다. 부인이 “제발 그만하라”고 울부짖었다. “며칠 후 그가 총을 품고 도장에 찾아왔습니다. 눈빛을 보고 알아챘지요. 초조하고 불안해하는 눈빛이었거든요. 내가 다가가서 그의 가슴에 손을 갖다 대보니 총이 감촉되더군요.” 박씨가 “너, 총 가지고 왔지?” 추궁하자 그는 떨리는 목소리로 “어떻게 알았느냐”고 했다. 박씨는 그를 사무실로 데리고 가 무도정신을 일깨우며 타일렀다. 그에 따르면 박씨와의 대결에서 패한 다음 아내가 이혼을 요구했다는 것. 박씨가 “정말 분하면 지금 나를 쏘라”고 하자 그는 잘못을 인정하고 빌었다. 어느 날은 평소 친하게 지내던 중국 식당의 안주인 메이가 파랗게 질린 얼굴로 박씨에게 달려왔다. 낮에 인근에 사는 흑인 청년 8명이 자신의 식당에서 밥을 먹었는데, “이 동네에서 2명을 제거해야 한다”면서 박씨를 꼽았다는 것이다. 나머지 한 사람은 키가 190㎝인 거구의 편의점 주인이었다. 아일랜드계인 그는 베트남 참전용사로 가게에서 좀도둑질하는 흑인들을 거칠게 다루기로 유명했다. 박씨는 경찰관 제자들을 불러 상의했다. 그들은 순찰차량을 도장 앞에 교대로 세워두는 등 만약의 사태에 대비했다. 그렇잖아도 한 달 전 박씨의 흑인 제자의 집에서 총격사건이 있었다. 누군가가 찾아와 초인종 소리에 문을 연 흑인 제자의 아버지를 총으로 살해한 것이다. 범인은 지역 불량배로 짐작될 뿐 잡히지 않았다. 불길한 예감에 사로잡힌 박씨의 머릿속에 얼마 전 휴가를 보낸 남쪽의 플로리다 해변이 자꾸 떠올랐다. 마음이 뜬 그는 한국에 다녀온 후 플로리다 이주를 결심했다. 뉴욕에 거주한 지 3년째인 1975년이었다. 플로리다로 건너간 박씨는 해변도시인 사라소타에 도장을 개설했다. 변호사, 의사, 경찰관, 은행가 등 다양한 직업을 가진 사람들이 입문하면서 서너 달 만에 수련생이 100여 명에 달했다. 작은 휴양도시인 사라소타 생활은 평화로웠지만 단조로웠다. 뉴욕의 제자들과 학부모들은 그에게 돌아와달라고 종용했다. 심지어 그리스계의 한 학부모는 아스토리아 전철역 부근에 새로운 도장 터를 마련해놓고 그를 졸라댔다. 결국 박씨는 1년 만에 다시 뉴욕으로 되돌아갔다. 불행한 소식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가 플로리다로 떠난 지 한 달도 채 안 돼 ‘살생부’에 함께 올랐던 아일랜드계 편의점 주인이 흑인들과 총격전 끝에 사망한 것이다. 중국 식당의 메이도 큰 사고를 당했다. 어느 날 중국인 청년 2명이 식당에 들이닥쳐 권총을 들이대며 돈을 요구했다. 주방에서 이를 지켜본 메이의 남편이 권총으로 맞서다 놀라 뛰쳐나온 여섯 살 난 아들의 머리를 실수로 쏘아버렸다. 아들은 즉사했다. 사건 이후 메이 부부는 식당 문을 닫고 뉴욕을 떠났다. 최홍희 장군과 재회 아스토리아 도장은 박씨에게 경제적 여유와 명성을 안겨줬다. 그의 제자들은 각종 무술대회에서 우수한 성적을 거둬 도장의 명성을 드높였다. 도장에 5분만 늦게 와도 다음 반을 기다려야 할 정도로 수련생이 넘쳤다. 당시 뉴욕의 스포츠 전당인 메디슨 스퀘어 가든에서는 매년 3월 첫 주 전미동양무술대회(올 아메리칸 태권도·가라데·쿵푸 챔피언십)가 열렸다. 이소룡과 척 노리스도 무술시범을 할 정도로 유명한 대회였다. 이 대회를 주관한 조시학(헨리 조)씨는 태권도 지도관 출신이었다. 박씨는 1977년 이 대회에 참가해 미국 무술대회에서는 처음으로 합기도의 띠술과 지팡이술을 선보였다. 또 엄지손가락으로 송판 2장을 깨고 2인을 상대로 한 단검 대련을 펼쳐 관중의 큰 박수를 받았다. 인기가 좋아 다음해 앙코르 시범을 하는 특전까지 누렸다. 박씨의 제자들 중 교포인 바비 홍은 특히 실력이 출중했다. 1981년 박씨가 플로리다로 다시 이주할 때 뉴욕에서 10여 명의 제자가 따라갔는데, 바비 홍도 그중 한 명이었다. 1987년 헬싱키에서 열린 세계태권도선수권대회에 미국 대표로 출전하기도 한 그는 박씨 밑에서 사범 노릇을 했다. 그밖에 그의 제자들 중 손꼽히는 사람으로는 빌리 팰튼, 필립 원, 래니 보고다노스 등이 있다. 이들은 전미태권도대회에서 우승을 차지하거나 세계태권도대회에 미국 대표로 출전했다. 일부 제자들은 UFC 같은 MMA(종합격투기) 대회에 선수나 사범으로 참가하고 있다. 1978년 박씨는 코네티컷주에서 열린 한 태권도대회에 참가했다가 최홍희씨와 재회했다. 친북인사로 낙인찍힌 최씨는 박씨에게 “나는 사상보다 태권도를 더 사랑한다. 사상과 이념을 초월해 태권도를 전세계에 보급하는 것이 나의 숙명이다. 무도인은 무도인의 길을 가면 된다”고 자신의 신념을 설파했다. 박씨는 그의 지론에 내심 동의했지만, 마음이 불편한 것은 어쩔 수 없었다. 태권도의 대부라 할 만한 최씨는 1972년 박정희 정권과의 불화로 태권도계에서 실권을 잃자 캐나다로 망명했다. 이후 자신이 창립한 국제태권도연맹 총재로서 북한 태권도계를 이끌었다. 그와 박씨는 남다른 인연이 있다. 그는 1969년 박씨가 베트남에서 생환했을 때 꽃다발을 들고 그의 숙소를 찾아가 격려했는가 하면 정일권 총리와의 만남을 주선하기도 했다. 박씨는 1971년 미국으로 떠나기 전 그를 찾아가 출국인사를 했다. 그 후 최씨한테 몇 차례 편지를 받기도 했다. “캐나다에 있던 최 장군으로부터 ‘북한 시범’을 함께 하자는 요청을 받았는데, 거절했습니다. 최 장군의 시범을 계기로 북한에 태권도 붐이 일었습니다. 예전에 한국에서는 태권도 사범이 깡패로 인식됐지만, 북한은 다릅니다. 태권도 사범이 국가적으로 존경을 받고 급여도 대학교수보다 낫습니다.”



갱단 보스에서 태권도 수련생으로
박씨는 한국 태권도와 북한 태권도의 차이를 이렇게 설명했다. “북한 태권도는 옛날 군대식입니다. 동작이 무겁고 주먹도 씁니다. 다만 기술은 단순한 편입니다. 이에 비해 한국 태권도는 기술은 좋지만 스포츠로 발전하다 보니 실전성이 약한 편입니다. 격파도 차이가 납니다. 예전에 군에선 자연석과 콘크리트를 맨손과 맨발로 깨뜨렸습니다. 북한이 그렇게 합니다. 그런데 한국에선 격파가 일종의 쇼입니다. 격파용 벽돌과 송판이 따로 있죠. 밀가루를 바른 얇은 송판을 쓰는데, 깨질 때 큰 소리가 나도록 송판 안에 화약을 깔아놓기도 합니다.” 최홍희씨는 2002년 6월 북한에서 사망했는데, 유언에서 ‘태권도 통합’을 강조했다. 최씨의 말이 아니더라도 일찍이 태권도계 일부에서는 남북통일의 일환으로 남북 태권도를 통합해야 한다는 주장이 제기됐다. 실제로 남북은 여러 차례 통합 논의를 했다. 최근엔 꽤 구체적인 협상이 진행되기도 했다. 올림픽 종목에서 태권도가 빠질 수 있다는 위기감도 통합의 중요한 명분이 됐다. 하지만 양측의 협상은 좀처럼 진척되지 않았다. 기술과 규정 통합을 먼저 하자는 남측(세계태권도연맹)과 기구 통합을 서두르는 북측(국제태권도연맹)의 의견 차이가 좁혀지지 않은 탓이다. 본질은 주도권 다툼이다. 올림픽 태권도 경기를 주관하고 회원국도 훨씬 많은 세계태권도연맹이 국제태권도연맹과의 대등한 통합을 받아들이기 힘들기 때문이다. 박씨는 “태권도인들 사이에서는 태권도 통합이 남북통일보다 더 어렵다는 얘기가 있다”며 웃었다. 1979년 여름 박씨는 자칫 살인을 저지를 뻔했다. 도장 부근 거리에서 욕설로 시비를 건 여러 명의 불량배와 붙었는데, 그 중 하나가 혼절했기 때문이다. 그는 뒤에서 박씨의 목덜미를 낚아채 돌리면서 박씨의 얼굴을 머리로 받았다. 엉겁결에 피했지만, 그의 치아가 이마에 부딪히면서 눈썹과 미간 사이가 깊이 찢어졌다. 화가 난 박씨는 주먹과 발로 그를 콘크리트 바닥에 눕혔다. 그러고도 분이 안 풀려 머리를 걷어찼다. 병원으로 실려간 불량배는 의식을 차리지 못했다. 박씨는 그간 미국에서 고생하며 성취한 모든 것을 한순간에 잃을지 모른다는 생각에 절망했다. 평소 박씨를 존경하던 그리스계 제자의 부친은 불량배가 혼수상태에서 깨어나지 못하면 뉴욕항에 있는 그리스 상선을 타고 그리스로 도피하라고 권했다. 다행히 그는 이틀 만에 깨어났다. 박씨의 제자 중에는 갱단 출신이 몇 명 있다. 그중 허버트는 키가 2m에 가까운 근육질의 흑인으로 한때 ‘검은 표범’이라는 흑인 갱단의 일원이었다. 그가 도전을 하자 박씨는 “6개월간 내 도장에서 수련하면 도전을 받아주겠다”고 제안했다. 약속대로 6개월 후 펼쳐진 대결에서 박씨는 밀어차기로 공격해오는 그의 옆구리를 옆차기로 내질렀고 그걸로 승부는 끝났다. 박씨의 제자가 된 그는 태권도대회에 출전했다가 편파판정에 분노해 난동을 부린 것이 계기가 돼 태권도계를 떠났다. 나중에 들려온 소문은 그가 다시 갱단으로 돌아가 마약을 한다는 것이었다. 그리스인 조지 칼차스는 뉴욕의 유명한 갱단에서 두목급으로 군림하던 인물이다. 유럽에 건너가 프랑스 파리의 밤거리를 장악한 그는 나중에 캐나다로 넘어가 갱단 보스로 악명을 떨치기도 했다. 그는 박씨의 제자가 된 후 겨루기에서 누구에게도 지지 않았다. 이탈리아계인 마이클 스카로라는 중학생 때 박씨의 도장에서 태권도를 배웠다. 키는 작지만 눈매가 무섭고 배짱이 대단했다. 집안이 갱단과 관련이 있는 그는 고등학교를 졸업한 후 갱단에서 활동하다 체포돼 살인, 갈취 등의 혐의로 20년이나 복역했다. 그는 감옥에 있을 때 이따금 박씨에게 전화를 걸어 안부를 물었다. “태권도의 지나친 스포츠화 경계해야” 1981년 플로리다로 이주한 박씨는 미국올림픽위원회 태권도연맹 플로리다주협회를 창설하고 초대 회장에 취임했다. 1987년엔 세계전통합기도연맹을 만들어 회장을 맡았다. 1995년엔 국기원 승단심사를 통과해 9단에 올랐다. 그해 그는 영문으로 된 ‘전통합기도’라는 무술 교본을 펴냈다. 그에 앞서 1988년엔 역시 영문의 ‘전통태권도’를 펴낸 바 있다. 1971년 박씨가 미국에 건너갈 때만 해도 미국인이 알고 있는 동양무술은 중국의 쿵푸와 일본의 가라데였다. 하지만 지금은 양상이 바뀌어 태권도가 대세라고 한다. “현재 미국에서 가장 인기 있는 무술은 태권도입니다. 가라데는 거의 끝났어요. 쿵푸도 시들었고요. 태국의 무에타이는 수련할 때 실제로 때리고 맞는 거친 무술로 인식돼 있어 부모들이 거부감을 갖고 있습니다. 아이들한테 위험하다고 생각하는 거죠. 지금 미국 태권도를 지탱하는 힘은 어린이들입니다. 미국 전역 어느 골목을 가도 태권도 도장이 있습니다. 문제는 태권도가 여기서 더 발전하지 못하면 가라데와 쿵푸의 전철을 밟을 수 있다는 거죠. 쿵푸와 가라데는 실전적 성격보다는 서커스적 요소가 강해 대중화에 실패했습니다. 앞으로 태권도가 진정한 무술로 살아남으려면 ‘보기 좋은 무술’을 지양하고 지나친 스포츠화를 경계해야 합니다. 아울러 고유의 무술정신을 살리고 호신술을 강화해야 합니다.” 성공한 태권도인의 명성에 걸맞게 박씨가 교민사회에서 차지하는 위상도 높아졌다. 플로리다 한인회 연합회장을 맡은 데 이어 미주 한인회 총연합회 부이사장과 부회장을 지냈다. 김대중 정부 출범 후엔 미주 평화통일자문회의 자문위원으로 위촉돼 2004년까지 네 차례 역임했다. 박씨는 인터뷰 끝에 베트남전에 대한 올바른 평가를 주문했다. “제가 오랜 포로생활을 견딘 것은 신앙심과 애국심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조국에 대한 믿음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죠. 베트남전을 지금의 잣대로 평가하면 안 됩니다. 당시 미국의 원조에 절대적으로 의존하던 한국으로선 파병이 불가피했습니다. 주한미군 철수 위협도 따랐고요. 그 시절 한국의 GNP가 북한보다 낮았어요. 오늘날 한국이 이 정도로 발전한 배경에는 미국의 지원이 있습니다.

아울러 베트남전 참전용사에 대한 잘못된 인식도 바로잡아야 합니다. 양민학살이나 용병 논쟁은 뒤로 돌리고 국가 경제발전에 이바지한 점을 평가해줘야 합니다. 적어도 모독은 하지 말아야 합니다. 미국처럼 참전용사를 예우하는 분위기가 조성돼야 합니다. 고엽제 환자는 물론 전쟁의 정신적 피해자들에게도 적절한 보상을 해야 합니다.” 

 (끝)

     
이름아이콘 최해영
2008-07-14 19:26
좋은 글이기에 끝까지 읽어보았습니다.ㅎㅎㅎㅎㅎ
최상영 해영님 무더운 여름철에 병상 생활에 고생이 많습니다,
빨리 괘차하시여 무더위가 누그러 지면은 부산모임을 한번가젔서
열굴도 한번보고 18대국회 법안문제을 나눌까 합니다,
몸조리 잘하섰서 건강 되차을시길 빌겠습니다,
7/14 2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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