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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해병 김차웅
작성일 2021/04/21 (수) 11: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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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 류 반대.
추천: 0  조회: 203  
기자니까 너는 알겠지, "정말 전쟁 나는 거냐?"
시사IN

기자니까 너는 알겠지, "정말 전쟁 나는 거냐?"

문정우 대기자 woo@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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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려서 어머니가 내 머리를 쓰다듬으며 마치 주문을 외우듯 되뇌이곤 하던 말이 있다."우리 정우야 군대 갈 일이 없겠지. 그 때까지 남북이 서로 으르렁대면 어떻게 해. 지겨운 놈의 전쟁. 지긋지긋한 군대."

하지만 어머니의 바람은 터무니없는 것이었다. 내가 입대하기 몇 달 전 군은 없어지기는커녕 정변을 일으켜 권력을 다시 장악했다. 나는 이제 예비군도, 민방위도 다 끝났고 어느덧 내 아들마저 군에 갈 나이가 되었다. 보나마나 지금 중학교에 다니는 늦둥이 둘째 녀석까지 군에 끌려가고 말 것이다. 끌려간다는 말이 거슬리는 분도 있겠지만 국민 개병제 하에서는 이보다 정확한 표현을 찾기 힘들지 않은가.
베트남에 파평되었던 32만 명 중 사망자와 중복 파견자, 해외 거주자를 제외하면 현재 국내에 생존한 베트남 참전 용사는 약 20만 명 정도로 추산한다.

극단의 시대였던 20세기를 통과해 살아온 대한민국 사람이라면 크든 작든 전쟁이나 냉전의 추억 한 두 가지는 안고 살게 마련이다. 6.25 때 갓 여고를 졸업한 어머니는 잠깐 동안 기초 교육만 받고 제3육군병원에 간호사로 투입되었다. 전선에서 부상병이 밀어닥쳐 의료 인력이 턱없이 부족했기 때문이다. 어머니는 그곳에서 주사를 놓는 기계가 되어가면서 전쟁의 참상을 제대로 보았다. 중공군이 물밀 듯 밀고 내려와 전선이 고착 상태에 빠지자 하루에도 수 백 명의 젊은이가 부모님이 주신 소중한 몸의 일부를 잃어버리고 신음하면서 실려 왔다. 모르핀이 부족했던 의사들은 젊은 병사들의 생살과 뼈를 톱으로 잘라내야 했다. 어제까지만 해도 꿈과 생기로 넘쳤던 젊은 몸뚱이가 속절없이 불구가 돼 널부러졌다. 병사들은 제발 죽여 달라고 애원을 했다. 병사들과 같은 또래였던 어머니는 그 때 전쟁을 일으키는 자는 신이라도 용서 못한다고 다짐했다.

바람둥이 할아버지 탓에 겪은 할머니의 '독특한 냉전의 추억'

평안북도 신의주가 고향인 할아버지와 할머니는 6.25 나기 직전 월남했다가 다시 고향의 문턱도 밞아보지 못하고 돌아가시고 말았다. 팔순이 넘은 아버지는 직계 가족이 북에 없기 때문에 이산가족 상봉 신청마저 포기했다. 이 분들은 평생을 이산의 아픔을 안고 산 전형적인 분들인데, 할머니는 그 외에도 매우 '독특한' 냉전의 고통을 한 가지 더 겪었다.

할아버지는 키가 훤칠하고 콧수염을 정성스럽게 기른 멋쟁이였고, 바람둥이였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우리 가족이 남쪽에 내려와 정착다운 정착을 한 곳은 과부촌이었다. 충남 당진의 한 궁벽한 마을이었는데 6.25 때 남쪽과 북쪽이 한 차례씩 서로 죽이는 바람에 남자는 씨가 말랐던 것이다. 과부촌에 미중년이 나타났으니 일대 사건이었다. 할머니는 할아버지가 외출할 준비를 하면 나도 얼굴을 씻겼다. 할아버지가 자전거에 올라타기 전 이미 나는 뒷자리에 앉아 있었다. 할머니가 할아버지를 감시할 혹을 하나 갖다 붙인 것이다. 읍내에 나갔을 때는 여러 과부들로부터 맛있는 것을 얻어먹었던 기억이 난다.

내게도 잊고 싶은 냉전의 추억은 있다. 충남의 과부촌을 떠난 우리 가족은 인천에서 오래 살았는데 휴가 나온 특수부대 요원이나 해병대원이 거리에서 행패를 부리는 일이 잦았다. 대학 시절 친구를 만나러 다방에 갔다가 탈영한 자칭 북파 공작원의 인질이 되고 말았다. 마치 영화 실미도의 한 장면 같았다. 그 때 장전된 총을 휘두르는 그 병사의 광기 어린 눈을 보면서 처음으로 죽음의 공포를 느꼈다. 다행히 바로 출동한 헌병대의 설득으로 탈영병이 총을 내려놓는 바람에 목숨은 건졌다. 군에서도 술에 잔뜩 취한 '말뚝'(이 작자는 사고를 쳐서 할 수 없이 장기 복무를 신청했다) 한 명이 총을 들고 내무반에 쳐들어온 바람에 죽을 고비를 넘긴 일이 있다.

이제는 모두 고인이 돼버린 김대중과 노무현 두 대통령 때 내가 잃어버린 것이 있다면 그것은 이와 같은 냉전의 추억이었다. 10년의 평화 지향 시대를 거치면서 냉전의 악몽은 어느덧 잠재 의식의 저 밑바닥으로 가라앉아 버렸다. 하지만 요즘 들어 그것들은 더욱 생생한 모습으로 되살아난다. 천안함 사태를 겪고 대통령의 전쟁기념관 담화 모습을 본 뒤부터는 아주 사소한 것까지 생각이 난다.

또 다시 등장한 "세상이 확 엎어졌으면 좋겠다"는 사람들

그렇다 전쟁불사론은 지금의 정부와 여당에서 갑자기 튀어나온 것은 아니었다. 멸공 맹신자들은 예전부터 평양에 탱크를 몰고 들어가는 것만이 진정한 통일이라고 공공연히 외쳐왔다. 못 사는 사람들이 이놈의 세상, 전쟁이라도 나서 한번 확 엎어졌으면 좋겠다고 얘기하던 일도 생각이 난다. 얼마 전 카드 돌려막기로 근근히 버티던 중소기업 사장은 내게 농반 진반으로 북한이 미사일을 쏴서 은행 전산망을 마비시켰으면 좋겠다는 말을 했다. 북은 다시 남조선 역적 도당이란 말을 쓰기 시작했고, 남쪽의 정부와 군, 언론도 북괴란 말을 곧 다시 살려낼 것이다. 군대 시절 GOP에서 내 귀를 멍멍하게 했던 양측의 대형 스피커 선전전도 다시 시작되리라. 그 때 북쪽에서 했던 얘기가 지금도 생생히 기억에 남는다. '지금 네 주변을 돌아보라. 돈 있고, 빽 있는 놈 한 명이라도 있는가.' 완벽한 냉전의 부활이다.

맛이 약간 갔든, 현실이 너무 어려워서든 전쟁이 났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는 자들에게는 베트남 작가 바오닌이 쓴 < 전쟁의 슬픔 > (예담, 1999)을 읽어주고 싶다. 1952년생인 바오닌은 1969년 하노이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영광의 제27청년여단'에 입대한 소년병 500명 중 끝까지 살아남은 10명 가운데 하나이다. 그가 전장 경험을 담아 쓴 자전` 소설 < 전쟁의 슬픔 > 은 1994년 영국 인디펜던트지 선정 최우수 외국소설상을 받았다. 맙소사 500명 중 10명이라니, 나는 소설을 읽으면서 오자가 난 게 아닐까 의심했다.

같이 입대한 500명 중 10명만이 살아남다.

소설에서 저자인 바오닌의 분신 끼엔은 전쟁이 끝나고 몇 년이 지났어도 악몽에서 깨어나질 못한다. 그는 사람이 많은 길 한가운데서도 가끔 백일몽을 꾼다.

나는 1972년 12월 어느날로 돌아가 피비린내 나는 '고기탕 언덕'을 지나고 있다. 살 썩는 냄새가 너무 지독해 코를 막는다. 그러나 정신을 차려보면 다시 사람이 많은 길거리에 서 있다. 많은 사람이 지나는 길 한가운데서 나는 미친 사람처럼 혼자 코를 막고 서 있다. ..... 이성을 잃은 채 광란의 학살이 자행되는 전쟁터의 화약 연기와 피비린내 속으로 다시 들어갈 준비를 하는 것 같다. 머리 속에서 이미 나는 살인자가 되어 있다. 살인과 잔인함에 대한 갈증, 온갖 짐승 같은 욕망이 가슴에 들끓는다.

전쟁에 이겨 침략자들을 끝내 물리쳤으며 통일된 조국을 건설했다는 자부심도 전쟁을 온몸으로 겪어온 이들에게는 조금도 위로가 되지 못한다. 어쨌든 평화가 온 것은 좋은 일이 아니냐는 끼엔의 말에 산전수전을 다 겪은 운전병 쩐 산은 거침없이 이렇게 소리 지른다.

"동무, 전쟁에서 승리를 거두었지만 우린 사실 패배했어. 우리 같은 사람은 이제 절대 평범해질 수 없어. 우린 이제 정상적인 목소리로, 정상적인 방법으로 말할 수 없게 되었어. 다른 사람들과 이야기할 수 있도록 인간다운 목소리를 찾으려면 오랜 시간이 걸릴 거야."

탱크 운전병이었던 브엉은 제대 후 버스기사가 됐다가 곧 운전대를 놓고 주정뱅이로 변해버렸다. 그는 차를 타기만 하면 온 세상이 흔들렸다. 물렁한 땅을 지날 때면 탱크로 시체를 밟아 터뜨리던 그 감촉이 생생하게 생각나 구토가 나고 숨이 막혀 견딜 수 없었다. 그는 차를 몰고 시장 길을 지날 때면 특히 참을 수 없는 충동에 시달렸다. 자전거나 행인을 보면 달려들어 깔아뭉개고 싶은 마음을 다스릴 길이 없었다. 그래서 운전대를 놓고 술잔을 잡았다.

월남전은 우리에게도 낯설지 않다. 어려서 백마부대나 맹호부대 노래를 신나게 불러댔던 기억이 난다. 김추자의 노래에 나오는 '월남에서 돌아온 그 새카만 김상사'들은 지금은 무얼 할까. 도대체 얼마나 많은 우리의 피끓는 젊은이들이 베트남의 정글에서 피비린내를 맡았는지 기억하는 이는 요즘 드물다.

베트남 파병 참전 용사 중 생존자는 20만 여명

베트남에 파평되었던 32만 명 중 사망자와 중복 파견자, 해외 거주자를 제외하면 현재 국내에 생존한 베트남 참전 용사는 약 20만 명 정도로 추산한다(공식 전사자 수는 5천여 명이며, 부상자는 1만1천여 명이다). 보훈처에 등록된 사람이 약 16만 명이고 나머지 4 만 명은 미등록 상태인 것으로 보인다. 전직 대통령인 전두환 노태우씨도 이른바 파월장병이다 베트남 참전 용사 단체는 크게 베트남참전전우회, 월남참전전우회, 고엽제전우회, 세 계파로 나뉜다. 이 중에서는 고엽제전우회가 가장 막강한 조직력과 결집력을 갖고 있을 정도로 고엽제 피해는 심각하다. 이들은 다른 나라의 참전용사와 마찬가지로 외상 후 스트레스 증후군에 시달리고 있다(보훈병원의 2000년 추산에 따르면 사선을 넘나드는 전투 현장에 있었던 1만5천 명 정도의 증상이 심각하다)으며, 전쟁의 피해자이면서도 자기가 참전한 전쟁이 명분 있었다는 것을 때로는 몸으로 나서 강변해야 하는 정체성의 혼란을 겪고 있기도 하다.

한성대학교 교양학부 김귀옥 교수 등 연구자 7명이 공동 저술한 < 전쟁의 기억, 냉전의 구술 > 에는 베트남 참전 용사들의 다음과 같은 진솔한 고백이 실려 있다.

포천 총기난사 사건이나 서해교전에 참전했던 사람들이 엄청난 후유증에 시달리고 있는데 1년 이상씩을 실전에 참가했던 사람들은 오죽하겠습니까. .... 우선 대인 관계를 못해요. .... 작은 일에도 흥분하고 화가 치밀고 ...말하기도 꺼리지요. 사람들이 미친놈 취급할까봐. 방송사에서 전우들 인터뷰를 하겠다고 해서 약속해두었는데 한 두 시간 전에 안 하겠다고 합니다. 하루밤에도 10번 이상 자다가 때요. 지금까지 부부간에 한 이불 덮고 자보지 못했어요. .... 가정이 깨져 노숙하는 사람도 많아요.

종전 35주년이 지나도 참전 용사의 발목을 잡는 외상 증후군

올해로 베트남 전이 끝난 지 35주년인데도 전쟁의 상처는 여전히 참전용사들을 놓아주질 않는다. 전장의 구체적이고 세세한 경험과 인간적인 고통, 죽어간 전우에 대한 기억과 현재까지 계속되는 트라우마는 참전 용사의 삶을 지옥으로 만든다.

수류탄을 던져 한 사람은 현장에서 죽고, 한 사람은 총에 맞아 마지막 숨을 거두는데 코를 고는 거에요. 잠자다가 코고는 것과 똑같아요. 이 마지막 숨 거둘 때 그때 눈을 동그랗게 뜨고 눈이 마주쳤는데 그 때 내가 확인 사살한 겁니다. 지금도 그 장면이 떠올라서 어디 가서 잠을 못 자요. 누가 코를 골면 발작을 일으키게 됩니다. 노크도 없이 누가 문을 열면 소리를 지르고 부들부들 떠는데 멈춰지질 않습니다.

미국의 베트남전 참전자 가운데는 정당하지 않은 전쟁에 나섰다는 자책감이나 사람들이 마음 속으로는 자신을 명분 없는 살인자라고 비난하리라는 뿌리 깊은 피해의식에 사로잡힌 사람이 많지만 우리나라는 그보다는 덜한 편이다. 특히 장교들은 자신들의 희생 덕분에 국가가 경제 발전의 초석을 쌓을 수 있었다는 강한 자부심을 갖고 있다고 < 전쟁의 기억, 냉전의 구술 > 은 분석한다. 하지만 사병 출신들은 장교 출신들의 이같은 '거창한 헛소리'에는 냉랭한 반응을 보인다. 그들은 높은 양반들에게 고엽제는 없었던 것이고, 고엽제 문제를 해결하는데 '별들'은 거의 도움을 주지 않았다고 생각한다.

우리가 월남 참전해서 박정희가 뭐 이렇게 자본을 형성해 가지고, 경제 건설 하는데 도움을 주었는데....그런 좀 인간의 문제와 전혀 관련이 없는 말하는 자들 말이야. '거창한 헛소리'하면서 그러니까 우리를 대우해줘야 한다는 애들 전부 실제 전투했던 놈들 아이여.

< 전쟁의 기억, 냉전의 구술 > 저자 중 한명인 윤충로 교수에 따르면 한국 사회에서 베트남 전쟁은 종결된 것이 아니고 부패하고 있다. 역사적 유기체가 부패중이란 것은 아직 많은 터부를 요구하는, 사회적으로 위험 천만한 상태를 말한다. 한국전에 이어 베트남전까지 소화하지 못한 비극적 사회에 또 다른 전쟁의 그림자가 덮치고 있다는 것은 불행하기 짝이 없는 일이다.

북한을 비방 말자고 맨 처음 공식 주장한 정부 관계자는 이후락

이명박 정부는 마치 남한이 북한에 유화책을 쓰기 시작한 것이 김대중 노무현 두 정부 때라는 듯 얘기하지만 사실과 다르다. 우리가 그동안 냉전의 추억을 잠재 의식 속에 묻어들 정도로 분단 상황을 의식하지 않고 지낼 수 있었던 것은 이 땅에 평화를 가져오려는 많은 이들의 노력이 쌓인 덕분이었다. 또한 북한과의 관계 개선을 위해 밀사까지 파견해 수뇌부간의 직접 대화를 시도했던 것도 김대중 정부나 노무현 정부가 처음은 아니었다. 한겨레평화연구소 소장 김연철씨가 쓴 < 냉전의 추억 > 은 결코 오류를 반복하지 말아야 한다는 생각에 오래된 기억의 창고에서 끄집어낸 고통스런 남북 교류의 역사이다. 김 소장에 따르면 남북 간에 대화가 멈추면 총성이 울린다.

"중상 비방하지 말자고 한 것은 그저 헐뜯고 욕하는 것을 삼가자, 다시 말하면 우리끼리의 추태를 남에게 보이지 말자는 단적인 표현이다."

이는 김대중이나 노무현 정부 시대의 어떤 각료가 한 얘기가 아니다. 1972년 남북 7.4 공동성명 발표 당시 이후락 전 중앙정보부장이 한 말이다.

북한과의 관계 개선을 추진하라는 박정희 대통령의 특명을 받은 이후락 부장은 1972년 5월2일 몰래 평양으로 갔다. 그는 여차하면 입에 털어넣으려고 청산가리 캡슐을 몸에 지녔다. 새벽 1시쯤 북한측 관계자가 그를 깨워 어디론가 데려갔는데 그 때 그는 청산가리 캡슐을 손에 쥐고 있었다. 그를 기다린 사람은 다름 아닌 김일성 수상이었다. 그는 악수하자고 손을 내민 김일성의 면전에서 손을 호주머니에 다시 집어 넣어 청산가리 캡슐을 떼낸 다음에야 악수를 할 수 있었다. 김은 의아한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김일성은 그 자리에서 김신조 등의 청와대 습격 사건에 대해 사과했다.

전두환 정권 때도 노태우 정권 때도 밀사가 오갔다. 전대협 대표 임수경이 평양 세계청년학생축전 개막식에 참가해 국내에선 보수 언론이 거품을 물고 쓰러지기 직전이었을 때 스탠드 위에서는 전두환이 보낸 밀사 박철언과 강재섭이 함께 공연을 보고 있었다. 가장 오래된 밀사 박철언은 1985년부터 1991년까지 남과 북을 오가며 북의 고위층과 모두 42차례의 회담을 가졌다.

대화가 멎으면 총성이 울린다는 남북 관계의 냉엄한 원칙

< 냉전의 추억 > 에 따르면 정권별 남북 회담 숫자는 김영삼 정부가 제일 적다. 박정희 정권은 111회, 전두환 정권은 32회, 노태우 정권은 163회, 김대중 정부는 80여회였다. 묘향산 국제 친선전람관에는 남측 인사들이 보낸 선물이 모두 전시돼 있는데 유일하게 김영삼 대통령 것만 없다. 재임기간 변변한 남북회담을 한 적이 없었으므로 선물을 교환할 기회도 당연히 없었다. 김영삼 대통령은 재임 기간 온탕과 냉탕을 정신없이 오가 미국과 북한 모두의 신뢰를 잃었다. 김영삼 전 대통령은 최근 자기가 마치 전쟁을 막았다는 식으로 큰소리를 쳤지만 재임 기간 중 역사상 가장 위험한 전쟁 순간을 맞이한 것은 우연이 아니다. 대화가 멎으면 총성이 울린다는 원칙이 그대로 적용된 것이다. 김영삼 정부가 결국 환란을 맞은 것도 안보 불안과 경제 위기가 겹쳐 나타났기 때문이다.
ⓒ청와대사진기자단 천암함 사건 당시 백령도를 찾은 이명박 대통령.

그렇다면 이명박 정부는 어떤가. 불길하게도 김영삼 정부의 경제와 대북 정책을 망쳤던 이들의 이름이 지금 정부에서도 많이 어른 거린다. 김연철 소장은 지난해 6월에 초판을 찍은 이 책에서 마치 미래를 예견이나 한 듯 다음과 같은 말을 써놓았다.

최소한 1994년의 기억을 잊지 말았으면 한다. 무능한 자는 전쟁의 공포를 자극한다. 지혜로운 자는 위기를 막을 대책을 찾는다. 무능한 자들은 언제나 보수의 옷을 입으려고 한다. 한국에서 색깔은 실력을 감추는 옷이다. 오늘도 실력은 없지만 색깔이 강한 전문가들이 설친다. 오늘도 무능한 정부는 공포를 뿌린다. 망각의 안개처럼.

1994년 6월6일 김영삼 대통령은 "북한이 무모한 모험을 강행한다면 자멸과 파멸의 길로 갈 것"이라고 경고했다. 이홍구 통일원 장관은 6월7일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북한의 전쟁 기도를 응징할 것"이란 결의를 밝혔다. 6월8일에는 김영삼 정부 취임 이후 처음으로 국가안전보장회의가 소집되었다. 한동안 안 보였던 멸공 차량이 등장하고 집권 여당에서 전쟁불사론과 국민의 안보불감증을 우려하는 소리가 터져나왔다. 요즘 신문을 다시 보는 듯하다.

친구 녀석이 오랜 만에 전화해 괜찮은 거냐고, 짐 싸서 동남아에라도 나가 있어야 되는 거 아니냐고, 너는 기자니까 좀 더 알 거 아니냐고 묻는다. 가만 있어보자. 1994년에도 느닷 없이 전화해 비슷한 소리를 늘어놓던 것이 이 녀석 아니었나? 으스스한 6월이다.

문정우 대기자 / woo@sisain.co.kr싱싱한 뉴스 생생한 분석 시사IN Live - [ 시사IN 구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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