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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정정관
작성일 2007/12/06 (목) 09: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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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의 발자취 눈물 피 땀(1)

  아버지의 발자취 눈물
 

  1948년 인천 금곡동 출생 60세, 6.25 전쟁의 잿더미 위에서 대한민국의 '아버지가 어떻게 인생의 험난한 길을 걸어왔는지‘를 후대들에게 증언의 필요성을 느낍니다. 우리 세대의 걸음들은 '눈물과 핏방울과 땀방울'로 점철된 고난의 행군이었습니다. 어린 시절은 전쟁으로 배고픔에 눈물을 흘렸고, 청년 시절은 월남 전선에서 피를 뿌렸고, 장년시절은 중동의 사막에서 땀을 쏟았습니다.

 

  지나온 가시밭길을 회상하니 눈물이 왈칵 쏟아지며 시야가 뿌옇게 흐려집니다. 하지만 우리 세대의 외롭고 힘든 여정은 다음 세대 도약의 밑거름이 되었기에 가슴 뿌듯합니다. 후대들이 오늘 이 만큼 사는 것을 바라보면 우리의 젊은 날 삶의 몸부림이 결코 헛되지 않았음을 감사하며 다시 한 번 조국의 파란 하늘과 미래를 보며 지친 몸을 추슬러 봅니다.

'아! 나의 세대여' 오직 살아야 한다는 일념으로 주먹으로 눈물 훔치고, 정글에서 피 뿌리고, 사막에서 땀을 쏟던 그 날의 현장으로 거슬러 올라 가보겠습니다.  

 

1. 잿더미 위의 눈물

 

  어머니 품에 안겨 큰 집 영종과 외갓집 용유도(영종과 용유도 사이는 인천공항)로 피난을 갔고 아버지 등에서 인천상륙작전을 바라보았습니다. 대 여섯 살 박이 꼬마는 흙먼지를 뒤집어쓰고 행군중인 미군을 향해 애처롭게 "헬로 기브 미"를 외쳤고 커다란 눈망울을 가진 한 흑인 병사가 사과를 한 입 베어 물고 남은 것을 주었습니다. 그때 그 사과를 받아들고 뛰며 좋아했던 일이 기억됩니다. 거리는 온통 국방색 물결을 이루고 노점상 좌판은 C.레이션과 초콜릿, 비스킷, 잼을 벌여 놓았고 그 옆에는 '슈산 보이'가 앉아 있는 것이 저의 어린 시절의 풍경입니다.    

 

  당시에는 군복은 최고의 읍성(입을 것)으로 쳤습니다. 헌병은 거리단속에서 야전잠바를 입은 사람을 세워놓고 선 채로 등짝에 '염색'이라고 씁니다. 그것은 군복을 입되 검게 염색해서 입으라는 것입니다. 하지만 어떤 이는 글씨가 쓰여진 채 그대로 입고 다녔습니다. 그때 가장 인기 있는 옷은 미군 정복이 '사지'라는 기지인데 색깔은 짙은 누런 담요 색을 띄고 있고 국방색 전투복에 비해 약간 두껍고 고급스럽습니다. 사람들은 이 옷을 뒤집어(우라까이) 만들어 결혼 예복으로 입었습니다.

 

  어린 시절은

 

  놀이터로서 주로 전쟁물자 폐품을 재활용하기 위해 쌀아 둔 큰 마당이었습니다. 인천 중구 유동과 도원동 사이에 아주 큰 빈 마당이 있었는데 거기에 이런 물건들을 불하 받아 산더미처럼 쌓아 놓았습니다. 코를 찌르는 냄새의 군복더미, 탄 티, 수통, 반합, 압박붕대, 야전 삽, 철모 그리고 첩첩히 쌓아놓은 군용 찝차와 스리쿼터 우리들은 그 사이에서 온 몸을 무장하고 전쟁놀이를 했습니다.

 

  소년 시절은

 

  형님과 함께 장사를 했습니다. "아이스 케키 얼음 과자, 달고 시원한 아이스 께키, 앙꼬나 우유 오렌지"를 외치며 거리를 누볐습니다. 런닝은 땀에 젖고 바지는 녹은 얼음물에 젖었으며 가녀린 어깨는 탄띠에 눌려 멍들고 발갛게 까졌습니다. 얼마 후 어름이 필요 없는 스티로폴 통이 나왔는데 참으로 가벼웠습니다. 그렇게 번 돈으로 '곰 표나 독수리 표' 밀가루 한 부대를 어깨에 메고 집으로 돌아 갈 때 어머니의 기뻐하는 모습을 그리며 개선장군이 되었습니다.

 

  청소년 시절은

 

  신문팔이로 '동 인천 역'에서 "석간이요 조선일보!" "내일 아침 동아일보!"를 외쳤습니다. 이때 역전의 스피커소리 "서울~행 발차."는 우리 신문팔이 목소리와 더불어 하모니를 이루었습니다. 힘들고 어려울 때 눈을 지긋이 감고 지금도 속으로 한 번씩 뇌어보는데 어떤 때는 눈물이 주르르 흐른답니다. 저 만치 흘러간 세월 저 편에서 "아이스 께키 얼음 과자!" "석간이요 조선일보, 내일아침 동아일보!"가 아련히 메아리쳐 옵니다. 

 

  중학교 때 형님과 함께 조선일보 금곡동 지국에서 신문배달을 했습니다. 멀리 숭의동 영국부대가 주둔한 곳까지 였는데, 진눈깨비나 비 오는 날이 제 일 힘들었습니다. 사람은 젖어도 신문은 젖으면 안되기에 비닐로 겹겹이 싸고 뛰고 달렸습니다. 한 겨울 영하 20도 너무 추워서 온몸이 얼어붙었고 굳은 손을 입김으로 '호호' 불고 비벼 신문을 꺼내 돌렸습니다. 숭의 로타리 어디쯤 염색공장의 담벼락에 물탱크가 뜨근뜨근 했는데 우리 형제는 그곳에서 온몸을 굴려 몸을 녹이는 즐거운 시간을 가졌습니다. 걷는 일이 없이 거의 뛰어 다닌 그 날들, 형제의 머리와 온몸에는 김이 모락모락 나고 집에 올 때쯤은 한기가 서렸습니다.


  지독히 가난한 초등학교 시절 점심은 거르기 일 수 였고 하루 두 끼 꽁보리밥과 수제비의 연속이었습니다. 부잣집 반장 도시락의 하얀 쌀밥과 노란 계란 후라이를 훔쳐보고 침을 꼴깍 삼키며 우물가로 달려가 물로 허기진 배를 채웠습니다. 이 무렵 가난한 아이들은 미국의 원조로 노란색 강냉이 빵과 우유를 먹고 마시는 특권을 누렸습니다. 그때 부잣집 아이들은 우리를 무척 부러워했습니다. 가난한 아이들이 노릇노릇한 빵을 볼이 터져라 먹고, 흰 우유를 마신 후 입가에 묻은 우유를 혀로 돌려 닦을 때, 그 행복한 표정은 요즘 같으면 영락없이 'CF' 감이었습니다.

  우리 육 남매는 양조장에서 술을 거르고 난 '찌개미'인 '모주'를 얻어다가 사카린 넣고 펄펄 끓여 허기진 배를 채웠습니다. 그 때의 숟가락은 미군부대에서 나온 '스픈' 이었는데 육 남매는 각자의 것을 갖고 있었고 그것으로 퍼먹었습니다. 달착지근한 모주는 사실 술이나 다름없었습니다. 그래서 모두 술기운에 볼이 불그스레했고 단칸방 아랫목 윗목에 포만감으로 누워있는 모습들 그건 행복이었습니다.

 

  아 그때는 온통 먹 거리 생각뿐이었습니다. 제분소에서 맨 나중에 나오는 가루를 '말 분가루'라고 하는데 사료로 쓰지만 우리는 그것을 사서 봉지에 담아 옵니다. 약간 붉은 색을 띄었는데 수제비를 만들어 먹으면 무척 껄끄러워 삼키기가 쉽지 않았지만 그래도 배가 부르니 행복했습니다. '두부 만들고 난 비지'가 주식이었습니다. 그리고 가끔 창영동 골목의 '꿀꿀이죽'은 훌륭한 먹거리였습니다.


  잊을 수 없는 가슴 뭉클한 추억이 있습니다. 우리 집 부엌과 옆집 부엌이 붙었는데, 담 사이 작은 들창이 있는데 그리로 옆집 아주머니가 어머니에게 이렇게 물었습니다. "집이 내일 아침먹이 있수?" "응 밀가루 남은 것 있어." "이것 좀 먹어봐!" 그렇게 해서 감자 몇 알이 넘어왔고, 수제비가 넘어갔습니다.

  그때는 지게꾼 구루마꾼 등이 많았는데, 만일 일감이 없어 양식을 사지 못하면 온 가족은 꼼짝없이 굶는 것이었습니다. 겨울나기는 참 힘들었습니다. 부잣집은 연탄을 500~1000장씩 들여놓지만 가난한 이들은 하루 벌어 저녁에 들어갈 때 밀가루 한 봉지와 매끼줄에 연탄 2장 끼워 가지고 돌아갑니다.

 

  한 번은 제가 욕심을 내고 힘 자랑 돈 자랑? 할 겸 매끼줄에 연탄을 3장을 그러니까 양쪽 합 6장을 들고 개선 행진하는데, 줄이 끊어져 연탄에 다 깨진 것입니다. 어째 해야 좋을지 깨진 연탄을 대야 담아 '강원 연탄' 보급소로 가져갔더니 맘씨 좋은 아주머니 흔쾌히 바꿔주시면서 "총각 힘 자랑하지마" 그 시절의 사람들은 비록 가난했지만 마음 씀씀이는 넉넉했고 훈훈했습니다.  

 

  쌀이 부족한 상태에서 어머니는 항상 양을 늘이기 위해 보리, 고구마, 콩나물, 김치, 잡곡, 끓인 밥 등으로 식단을 꾸렸는데 지금 생각해보면 웃음이 납니다. 왜냐하면 요즘으로 말하면 건강식을 저절로 했기 때문입니다. 그때는 부자는 쌀밥, 가난한 이들은 보리밥과 수제비로 통했기 때문입니다.

 

  한번은 어머니가 밥을 푸다 모자라니까 누른 밥에 물 붓고 몇 술 뜨고 우물가로 나가 물로 배를 채웠습니다. 밥상이 들어오고 형제들이 둘러앉았습니다. 우리는 "어머니 것은 요?" "응 나는 부엌에서 배불리 먹었어"하고 배를 쑥 내미는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나는 우물물을 벌컥 벌컥 들이키시는 것을 다 보았기에 형제들을 향해 이렇게 말했습니다. "공출" 이것은 당시 사용하던 용어로 한 숟갈씩 덜어서 또 한 그릇을 만드는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어머니도 함께 식탁에 둘러 앉으셨습니다.

 

  아버지는 일제시대에 기차 만드는 차량공장의 기술자였지만 전쟁 후 실직하시고 미군부대에서 나오는 폐품들을 수집해서 그것을 재활용하여 가정에서 쓰는 물건들을 만들었습니다. 드럼통을 두들겨서 펴고 자르고 붙이면 아주 희안한 물건들이 나오는데 그래서 저는 우리 아버지가 솜씨가 최고 인줄 압니다. 깡통을 작두로 자르고 펴고 뚝딱거리면 석유풍로와 화덕과 난로가 근사하게 나왔습니다.

 

  그때는 아버지와 같은 분들이 주위에 많았는데 그들의 새벽의 망치소리가 동네를 깨웠습니다. 여기 저기 뚱땅거리더니 미군 스리쿼터를 개조해서 합승을 만들어서 타고 다녔으며, 나중에는 시발택시, 새나라, 그리고 현대차 등으로 이어져 오늘에 이르게 된 것입니다. 


   인천 중구 유동에 '월남 촌'이 있습니다. 그렇게 이름이 붙여진 것은 월남에 민간인 기술자들이 많이 갔는데 인천에서는 주로 '한진 회사'로 가서 돈 벌어 온 사람들이 집을 짓고 살았기 때문입니다. 당시 비둘기 집 같이 아름답게 지었는데, 그래서 모든 이들이 그곳에 살기를 흠모하였습니다. 제가 19살 무렵 그곳에서 아버지를 도와 건축하는 일을 했습니다. 그때 얼마나 열심히 일했는지 잠이 오지 않는 '나이트 스루우'라는 껌을 씹어가며 밤을 꼬빡 꼬빡 새워가며 아버지를 도왔습니다.

  한번은 매서운 추운 겨울 날, 불이 활활 타오르는 장작나무 난로를 가운데 두고 여럿이 삥 둘러 이리 저리 불을 쬐고 있었습니다. 저도 몸을 녹이는데 뒷짐을 지고 난로에 바싹대다가 그만 바지에 불이 붙었습니다. 어쩐지 좀 뜨겁더니만 황급히 불을 끄고 보니 바지 겉옷은 상했지만 속옷으로 인해 몸은 말짱했습니다. 그 날 한바탕 웃고 어머니가 내오신 점심 ‘동태두부찌개’는 영원히 잊혀지지 않습니다. 

2. 월남 전선의 피  

 

  1970년 2월, 23살에 육군에 입대를 했고 얼마 후 바로 베트남 전쟁터에 지원을 했습니다.


   "부모님 전 상서 이 편지를 받으실 때는 저는 이 억 만리 '월남전선'에 있을 것입니다. 제가 송금한 돈은 그동안 모은 월급과 한국군 병사 일 년 치 월급인데 부모님과 동생들 굶지 않게 쓰세요. 또 월남에서 돈을 부쳐 드릴 테니 필요한데 쓰시고 동생들 공부중단하지 않게 해 주세요 은반지는 꼭 끼고 있겠습니다." 이것은 파월 훈련소 오음리에서 눈물로 쓴 유언장이었습니다.

  논산훈련소부터 왜 그렇게 배가 고픈지 돈이 있으면 PX에 가서 빵이라도 사먹을 텐데 그럴 형편이 안되었기에 늘 배가 고팠습니다. 창피하지만 식기 통을 씻고 나면 불은 밥이 물가에 모이는데 그걸 모아서 먹은 적도 있었습니다. 자대 배치와 이어지는 훈련 그리고 맨몸도 오르기 힘든 가파른 산기슭을 칡으로 시멘트를 온몸에 동여매고 적의 토치카를 향해 기어가듯 악착같이 오르고 방카를 구축해 나갔습니다. 그때의 힘의 근원은 군가에서 나왔는데 가사가 너무 좋습니다.

 

"사나이로 태어나서 할 일도 많다만 너와 나 나라 지키는 영광에 살았다 전투와 전투 속에 맺어진 전우야 산봉우리에 해 뜨고 해가 질 적에 부모형제 나를 믿고  단잠을 이룬다."


  어느 날, 달 밝은 밤 새벽 2시 보초를 서면서 끓는 피를 조국과 자유 평화를 위해 바치고 싶었습니다. "그래 가는 거야 베트남!" 이대로 살수는 없어 날이 밝은 뒤 "소대장님 저 월남을 지원하겠습니다." 소대원들은 가면 죽는다고 극구 만류하지만 이미 저는 마음을 굳혔습니다. 중대장님은 저를 불러 제 병과로는 갈 수 없다고 하기에 "그럼 제 2병과로 가겠습니다." 중대장님은 심각한 모습으로 "그 병과는 가면 죽어 타켓트야 살아 돌아오기 힘들어" 하지만 완강하던 제가 이기고 춘천 오음리로 향했습니다.

 

  그곳은 월남과 똑 같은 지형지물을 구축하고 밤 낯으로 훈련을 거듭하는 곳입니다.  훈련 중, 돌격 앞 지점에서 발에 뭔가 걸리는데 부비트랩의 인계 철선을 건드린 것입니다. 순간 '피식~꽝' 그 지뢰는 모형이었지만 곧 연기 신호가 오르고 저는 사상자로 분류되어 급히 후송되었습니다. "왜 하필이면 내가 지뢰를 밟았을까?" 불길한 예감에 혹시나 하면서 뜨거운 눈물을 흘렸습니다.  

  당시 오음리 훈련소는 밥을 마음껏 먹도록 자유 배식을 하였습니다. 그리고 부식도 자대 보다 훨씬 좋았습니다. 거기서 가장 인기 있는 것은 조미료 였습니다. 식당에서 주는 쓴 된장국물에 이것만 넣으면 기가 막히게 맛있었습니다. 큰 것을 하나 사 가지고 다니는데 전우들이 "정 일병, 쪼끔 만 줘." 저는 크게 인심을 쓰면서 "너무 많이 치면 밍밍해"로 응수하며 아꼈습니다. 제가 인기가 있었던 것은 술 담배를 전혀 안 하기에 제 곁에 딱 붙어 있으면 누구든 화랑담배를 차지하게 됩니다. 

 

  파월 이틀 전, '정정관 일병 부모님 면회'

 

  '아니 부모님이 어떻게 알았을까?' 알고 보니 자대 에서 저의 월남 지원 사실을 통보했던 것입니다. 면회소에서 사색이 된 부모님의 모습을 뵈오니 죄스러웠습니다. 넋이 나간 어머니는 땅 바닥에 주저앉아 울며불며 제 손을 놓을 줄 몰랐고, 좀처럼 눈물을 흘리지 않는 아버지는 돌아서서 눈물을 훔쳤습니다. 그 날 부대 앞에서 '십자성과 야자수가 새겨진 은반지'를 사서 끼워주셨습니다. 그것은 적군이 물에 독약을 넣었으면 반지를 담가보고 마시라는 것인데 반지가 검게 변색이 된다는 것입니다.

 

  그 날 부모님은 저를 가운데 뉘이고 서로 안으시며 꼬박 밤을 지새우며 한숨을 지으셨습니다. 다음 날 부대 앞에서 어머니는 하염없이 우셨습니다. "이것아 난 너 없으면 못살아, 어쩌자고 전쟁터를 지원해가니" 그리고 끝내 주저앉아 대성통곡이었습니다. 시간은 부모님과 저를 떼어놓았습니다. 아버지의 부축을 받으며 돌아서신 어머니의 축 쳐진 뒷모습 아! 자식을 낳아보니 그것이 얼마나 불효인가 나중에 깨달았습니다. 

 

  훈련을 다 마치고 부대 마크를 달게 되는데 100 퍼센트 병과를 따라 부대가 정해지지만 드문 경우 다른 부대 차출도 있습니다. 예컨대 '주월 사령부' 혹은 비 전투부대인 '비둘기부대나' '십자성부대'로 배치되면 살아 돌아 올 수 있는 확률이 높기 때문입니다. 한 가닥 희망을 안고 침상에 앉아 초조히 기다렸습니다.

 

  전투부대인 '맹호' '백마'가 교차되어 부르다가 제 이름이 호명되면서 "정정관 맹호" 그리고 '맹호 마크'가 주어졌습니다. 속으로 신음했지만 의외로 차분하게 올 것이 왔구나 하며 담담하게 받아들였습니다. 그 날 밤 포효 하는 맹호 마크를 어깨에 부착하고 춘천에서 부산을 향하는 군용 열차를 탔습니다. 손에는 태극기 머리도 태극기 온통 태극기 물결 속에 목이 터져라 군가를 부르고 또 불렀습니다.  

   "자유통일 위해서 조국을 지키시다. 조국의 이름으로 님들은 뽑혔으니. 그 이름 맹호 부대 맹호 부대 용사들아. 가시는 곳 월남 땅 하늘은 멀더라도. 한결같은 겨레 마음, 님의 뒤를 따르리라. 한결같은 겨레 마음, 님의 뒤를 따르리라."

 

  서울 청량리, 대전, 대구 등에 머무를 때마다 '가족들의 울부짖음과 한숨, 주저앉음과 실신' 그 날의 재회가 이 세상에서 마지막이 된 경우가 허다한 것을 나중에야 알았습니다. 혈육과 고향산천을 뿌리치고 남으로, 남으로 마침내 부산에 도착했습니다. 이어서 부둣가에서 우렁찬 군악대와 부산시민들이 환송을 해주었습니다. 식순에 따라 합창을 부를 때 저는 사나이로 울지 않으려고 입술을 깨물었습니다. 하지만 내 속은 슬퍼 울고 있었습니다. 군악대의 소리는 더 이상 우렁차지 않았고 '진혼곡'처럼 슬피 들렸습니다.   

   

  1971년 6월 27일 거대한 회색 수송선 '바렛드호'의 계단에 발을 올리는 순간, 이런 생각이 스쳤습니다. "다시 이 땅을 밟을 수 있을까?" 갑자기 가슴과 목이 메이며 어머니의 얼굴이 어른거렸습니다. 승선 후 갑판에 바짝 붙어 "잘 있거라 부산 항구야... 또 다시 찾아오마..." 부두의 여학생들의 사모곡의 합창은 처연하게 우리의 가슴을 때리고 울렸습니다.

 

  마침내 '부~웅 부~웅' 출항의 뱃고동 소리가 들렸습니다. 그러자 일제히 "와~아"하고 자지러지는 외침과 탄식과 비명과 눈물이 부산항을 울리는데 고국산천은 온통 잿빛이었습니다. 이어서 수송선은 매정하게 부두를 뿌리치고 오륙 도를 벗어나 멀리 멀리 수평선으로 향했습니다. 

 

  수송선에서 몇 가지 지시 사항을 받을 때, 인상 깊은 말을 들었습니다. "오늘부터 장병들은 일등국민이다." 이 말은 모든 일에 미군과 똑같은 대우를 받는 다는 뜻입니다. 식당의 음식은 난생 처음 보지도 먹어보지 못했던 것으로 가득하고 '뷔페 식'이며 매끼니 마다 먹고 마시는 것이었습니다.

  한편 제일 힘든 것은 처음 사용하는 '양변기'로 도무지 앉아서 일을 볼 수가 없었습니다. 나중에 한 전우가 기발한 방법을 가르쳐 주었는데, 변기 안에 휴지를 넣고 양변기 위에 올라가 쪼그려 앉아 일을 본다는 것입니다. 휴지를 넉넉히 넣지 안으면 튀어 오르니 조심하라는 안전교육을 받고 모두들 만족한 결과를 보았습니다.

 

  월남 땅에 도착하기 전 날 밤 천둥번개가 얼마나 치는지 잠을 이룰 수가 없어 갑판 위에 올라갔습니다. 하늘은 구름이 끼였지만 간간이 십자성이 보였고, 멀리 월남 땅이 거무스름하게 윤곽을 드러내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천둥번개는 전투 중에 일어나는 포격전이었습니다.

  그렇게 인생을 자신만만하게 살아왔지만 "아! 어쩌면 죽을지도 모르겠구나?"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날이 밝고 하선하여 첫 발을 땅에 디딜 때 포연으로 인한 화약 냄새가 진동했습니다. 사단본부까지 가는데 거리의 가옥들은 처참하게 부서져 황폐했습니다. 그 사이로 월남인들이 우리를 무표정한 얼굴로 바라보는데 눈은 초점을 잃은 채 힘이 없었습니다.

 

  사단본부에서 전투식량 C~레이션, 하얀 소금정제 한 움큼, 빨간색 말라리아 알약을 먹었습니다. 다음 날 방탄조끼를 입고 M16소총과 실탄을 최대한 몸에 두르고 맹호 26연대(혜산진부대)가 주둔한 '송카우 안빈탄' 지역으로 이동하기 위해 방탄트럭에 올랐습니다. 우리를 호송하기 위해 기동성이 뛰어난 코멘다, 화력이 강한 APC 장갑차가 앞서고 병력을 실은 방탄트럭과 군수 물자 등을 실은 50여대의 차량이 1번 국도를 질주했습니다. 

  베트콩은 주로 야자나무 숲 속이나 산모퉁이를 돌 때 기습을 해오기에 길 양편에 의심스러운 곳은 무조건 사격을 가 하였습니다. 길가에는 적의 B.40 로켓포에 맞아 불타버린 장갑차와 트럭들이 간간이 나뒹굴고 있었습니다. '꾸멍고개' '송카우' '안빈탄'을 지나 마침내 26연대에 도착했습니다. 그리고 신병 보충대에서 예하 대대 중대 부대배치를 또 기다렸습니다. 듣자니 어느 대대 및 중대로 배치되면 60-70%퍼센트는 전사한다는 것이었습니다.

 

  무전기를 틀어보면 숨가쁘게 날아드는 구조요청이 들립니다. 야간 비행을 하는 '다스톱브(구조헬리콥터)'의 굉음에 섞여 '낙엽 3' '절름발이 5' 낙엽은 전사이며 절름발이는 부상병이었습니다. “아 이제는 전투의 실전에 임하는 구나”하니 두려움에 몸을 떨었습니다. 신병 보충대에서 초조하게 기다리던 중 방송이 흘러나왔습니다. 오후에 진중 예배가 있으니 모이라는 것이었습니다. 신병들은 기다렸다는 듯이 모두 예배에 참석했습니다.

  그 날 군목 목사님의 설교를 듣고 하나님을 믿고 의지해야 겠다는 결단을 내렸습니다. 목사님과 개인 상담을 할 사람은 밤에 벙커교회로 오라는 것을 끝으로 예배를 마쳤습니다. 그 날 밤 유난스럽게 포탄과 예광탄 이 날아드는 날, 저는 태어난 후 처음으로 신앙을 갖기 위해 교회를 찾아가 무릎을 꿇었습니다. 그리고 단 한마디 "목사님 저를 살려 주세요" 군목님은 이렇게 기도를 해주셨습니다.

 

  "전능하신 하나님! 하늘 문을 열고 굽어보시옵소서 이 전쟁터 생사의 갈림길에서 주님의 품을 피난처로 삼고 찾아왔사오니 원컨대 받아주시고 은혜와 긍휼을 입혀 주옵소서, 이곳에 머무는 동안 어느 상황에서도 침착하며 바른 판단을 주시고 담대함과 용기를 주시옵소서, 매 순간 주님을 의지하는 가운데 기적의 보호를 경험하게 하옵소서 생사를 주관하시는 주님께 이 병사를 의탁 드리옵고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 드립니다. 아멘"

  그 엄숙한 기도 앞에 저는 "살았구나"라는 안도감과 밀려오는 평안에 그저 감사해서 어깨를 들먹이며 울고 또 울었습니다. 그 날 이후 자대 배치를 받았는데 기적 같게도 저의 원래 병과를 찾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저의 소속은 주월 한국군 맹호(수도사단) 제26연대(혜산진부대) 전투지원중대였으며 다시 본부소대 중대장 '전령'으로 보직을 받고 23개월 동안 세 분의 중대장을 모셨습니다.  

 

  전투지원중대는 작전 범위가 넓어서 일반 정찰, 정글 매복, 중화기 지원사격, 병참 수송에 따른 칸보이 호송, 연대의 전방위 OP 기지를 운용하였습니다. 저는 평상시 중대장을 돕고 상황에 따라 전술기지의 관망대에서 때로는 거미줄같이 연결된 방카에서 경계근무를 합니다. 참호에 크레모아 격발기, 수류탄 실탄 조명탄이 가지런히 놓여있어 즉각 대응하던 것이 눈에 선합니다.

  한번은 우리 중대의 에께끼(대공포로 캬라바 5.0 네 문이 달렸는데 지상용으로 개조해서 사용함) 방탄트럭이 도로 매복에 습격을 받아 여기저기 구멍이 숭숭 뜷려서 돌아왔는데 다행히 부상자는 없었습니다. 사단 및 연대 급 작전에 앞서 엄숙한 행사를 치르는 데, 그것은 유서를 쓰고 손톱 발톱 머리카락을 잘라 흰 봉투에 넣어 유사시 유품을 대신하는 것입니다. 참으로 여러 차례 이 의식을 행하였습니다. 대규모 작전 시는 누구나 시누크나, UH1 헬기를 타고 작전지역에 투입합니다.

 

  옛날 프랑스군이 전멸했다는 묘초산 정글에 헬기로 랜딩하고 4.2인치 박격포를 쏘던 일, 고엽제가 뿌려진 정글과 늪지대 통과, 특히 우리 맹호사단의 이웃 기갑 연대의 '안캐패스 전투'는 전사에 길이 남을 것입니다. 이웃 수색중대는 주로 정찰임무인데 특히 매일 하는 도로정찰은 그 중 매우 위험합니다. 그 날도 수색중대의 첨병이 AK47 실탄에 철모가 뚫리고 머리를 관통한 일, 엄호를 받으며 접근했지만 철모에 피만 흔건히 고인 채 말이 없었습니다.

  이웃 부대는 매복에 들어가다 부비츄렙에 걸린 일, 호송을 맞은 APC 장갑차가 B40에 맞아 그 안의 전우가 모두 숯덩이가 된 일, 세이파 공격으로 중대 전술기지가 유린되어 한 소대가 전멸된 일, 그래서 남은 전우가 유품을 정리해서 고국의 부모님께 보낼 때는 피눈물을 쏟기도 합니다. 그러나 대부분 우리 한국군은 혁혁한 전과를 올리며 자유 평화를 구축해 나갔습니다. 


  헬기장에 급한 부상병이 들어올 때 군목은 가장 먼저 달려가서 팔다리가 잘려져 나간 전우, 가물가물하는 의식을 잃어 가는 전우를 끌어안고 정신 차리라고 호령합니다. 그 군목님은 우리 중대 방카 내무반에 오셔서 찬송가에 앞서 "나의 살던 고향은 꽃피는 산골"을 부릅니다. 그리고 우리 꼭 살아 돌아가자고 부둥켜 않아 주며 기도 해주었습니다. 병사들이 임무를 마치고 귀국하는 날 목사님은 연대 정문 방카 위에 올라가 대형 태극기를 흔들며 환송해주시는 모습은 영원히 기억에 남습니다.

  

  귀국할 때 저도 B형 박스를 가져왔는데 그 안에는 C-레이션을 비롯해서 온갖 것들이 다 들어 있었습니다. 그 중에 선호하는 것은 탄피였습니다. 큰 탄피에 작은 탄피를 끼고 박고해서 고국에 가져가면 돈이 꽤 되는 것입니다. 하여튼 별의 별것들을 다 고국으로 보내졌고 항해수당에서부터 전투수당인 모든 월급은 고스란히 고국으로 보내졌습니다.
          
  저는 월남 복무연장으로 인해 한 달간 휴가를 얻어 사이공 탄손누트 공항에서 오산비행장으로 날아 들어왔습니다. 오산비행장으로 내린 이유는 '영현'과 함께 왔기 때문입니다. 지금 그 전우들은 동작동에 고이 잠들어 있고 앞서간 전우들의 피 값은 이 조국을 번영시키는데 밑거름이 되었습니다.


  저는 피 흘리고 돌아온 고엽제 전우들을 정부가 돌보기를 간청합니다. 어떻게 그렇게 철저히 외면하는지 모르겠습니다. 몸 안에 흐르는 다이옥신으로 인해 살이 마르고 뼈가 뭉그러진 것을 누가 보상해줍니까? 늙어 가는 전우들에게 언제 햇볕이 찾아 들는지? 요즘은 작전 중, 정글에서 마셨던 물이 혹시 고엽제로 제 몸에도 남아있지 않는지 때로는 불안하기도 합니다.

 

  본국 휴가 중 집에 와보니 대문에 '용사의 집' 이라는 팻말이 붙어있어 참으로 기분이 좋았습니다. 당시 정부에서 여러모로 각별히 신경을 써주었다고 합니다. 다시 월남으로 원대 복귀해서 근무 중 스피커에서 이런 방송이 흘러나왔습니다. "여기는 인천시청입니다. 인천 출신 장병들은 귀를 기울여 주시기 바랍니다.“

  전우들은 "정병장님 인천입니다." 잠시 후 첫 번째로 한 어머니가 나오셨는데 저의 어머니였습니다. "정관아! 엄마다. 네가 휴가 다녀 간 뒤로 이 에미 마음이 훨씬 안정 되었구나 집과 동생들 걱정은 말고 너나 몸 건강히 있다가 무사히 귀국하기를 엄마는 매일 기도드린다."

 

  현행 참전용사에게 주어지는 보훈 혜택은 65세 이상 월 7만원입니다. 저의 참전자의 작은 소망과 바램은 그 작은 물질보다 국가를 가난에서 구해낸 우리 전우들을 ‘국가유공자’로 인정해주는 것입니다. 그러면 오늘 죽어도 눈을 감을 것 같습니다. 요 즘 별의 별 이상한 부분에 국가유공자가 붙고 우리 전우는 외면당하고 있는 것입니다. "아 불쌍한 내 전우들이여!"   

  제대 후 참전용사의 피로 깔았다는 경부고속도를 처음 달렸을 때, 번영의 기쁨보다 동작동으로 간 전우들 생각에 가슴이 메어졌습니다. 고국에 돌아온 후 지금까지도 이상한 현상이 제 몸에 일어나고 있습니다. 그것은 숲이 우거진 골짜기를 통과할 때, 나도 모르게 숨소리가 작아지고 온몸을 움츠러들며 경계하는 행동을 취합니다.

 

  지금도 헬리콥터 소리를 들으면 몸이 사려지며 동시에 환영으로 M.16 개인화기를 앞에 총 한 채, 방아쇠의 자물쇠를 풀고 노리 쇠 후퇴 전진, 약실에 탄환이 들어갔는지 확인하는 액션을 취합니다. 왜냐하면 적과 조우할 때 최초의 한발 발사가 누가 먼저인가에 따라 살아남기 때문입니다. 남들이 좋아라하는 밤하늘 불꽃놀이 그러나 참전용사는 또 다른 환영으로 그 날 전쟁터의 야간 사격과 오버랩 되기 때문입니다.

  군대는 중대 급 전술기지 베이스캠프별로 실전은 물론 야간에 최대 화력을 실시합니다. 이때 하늘은 각종 조명탄으로 크고 작은 빨갛고 노랗고 푸른 색깔로 제 각각 낙하산을 타고 내려오고, 추진 체는 "쉬이~쉬이' 기묘한 소리를 내며 곤두박질합니다. 4발에 하나 낀 예광탄은 진분홍색으로 발갛게 달아올라 표적을 향해 날아가고 그 뒤로 집중사격은 빗발치듯 날아갑니다.

 

  병사들에게 제일 무서운 것은 고요와 적막입니다. 그것도 어둠 속에 적막은 두렵습니다. 그래서 차라리 조명탄을 올리고 크레모아를 터트리고 총을 쏘고 콩 복 듯한 총소리가 돌아 내 귀에 들릴 때 나는 평안해집니다. 그것은 곧 나는 두려움 속에 있다는 증거입니다. '아 이 환영과 이 역설을 누가 알겠습니까?'

  프랑스 파리에서 1973년 1월 27일 휴전 협정이 조인되었고 연합군은 60일 이내에 철수를 해야 합니다. 저는 제대를 넘겨 버렸습니다. 왜냐하면 휴전 직전이었기 때문에 교체병력이 오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맨 나중의 철수병력은 아주 위험하기에 꾸멍 고개를 넘어 돌아갈 때는 방탄 트럭에 또 매트레스를 덧대어 탄환이 뚫지 못하도록 했습니다. 아 마침내 1973년 3월 9일 퀴논 푸캇 비행장에 이륙하면서 살았다는 안도감을 가졌고 대구 동춘 비행장으로 23개월 만에 무사히 귀국 26세에 전역을 하였습니다.

  

  지금은 34년이 흘러 60세가 되었습니다. 몸이 예전 같지 않아 혹시나 하면서 고엽제 후유의증 신고를 위해 침례병원에서 검진결과 ‘고지혈증’ ‘고혈압’ ‘당뇨’이었습니다. 2007년 8월 부산보훈병원에 고엽제 후유의증 신검을 마쳤습니다. 그날 옛 전우들을 만났는데 약 40명 정도가 신검을 함께 받았는데 모두들 병색이 완연했습니다. 휠체어의 전우, 지팡이 몸을 의탁한 전우, 정말 가슴이 미어지게 아팠습니다. 저는 지금 부산 원호병원에서의 고엽제 등급 판정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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