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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최상영
작성일 2020/10/13 (화) 10:12
홈페이지 http://hgvvk.co.kr
분 류 감사
추천: 0  조회: 272  
한국베트남파병에대하여 기록실문서해설 전투수당 받아습니다
박정희 대통령 시기의 월남관계 문서 (전투수당지급)(숨긴브라운각서공개하라.
조진구(도쿄대학교 국제정치학 박사)
1. 서론
최근에 대통령기록관이 공개한 박정희 대통령 시기의 월남 관련 기록물은
1964년 7월부터 1975년 12월 사이에 만들어진 문서 108건이다. 시기적으로
보면, 한국이 군대를 베트남에 처음 파견했던 때부터 베트남의 공산화 후 한
국 교민과 공관원이 사이공에 억류되어 있던 시기에 해당한다.
베트남전쟁에 본격적으로 개입하기 시작한 미국의 지원요청(1964년 5월)을
받아들여 한국 정부가 처음으로 군대를 베트남에 파견한 것이 1964년 9월이
다. 1973년 1월 27일 파리평화협정이 조인되고 두 달 뒤인 3월 미군은 베트
남을 떠났으며, 잔류해있던 한국군도 항공기를 이용해 3월 말까지 철수를 완
료했다. 그로부터 2년 1개월 후인 1975년 4월 북베트남군에 의해 사이공이
함락되면서 베트남 전역이 공산화되었는데, 당시 사이공에는 공관원을 포함
해 다수의 한국인이 억류되어 있었다.
공개된 문서의 생산기관이 대통령비서실로 되어 있지만, 외무부와 주월한
국대사관의 전문을 대통령비서실의 담당비서관이 대통령에게 요약 보고한
것이 대부분이다. 또한 문서가 특정 주제를 전체적으로 이해하는 데 충분할
정도로 망라되어 있지 않다는 점도 아울러 밝혀둘 필요가 있다.
예를 들어 한국이 지리적으로 멀리 떨어져있고 직접적인 이해관계가 적었
던 베트남에 군대를 파병한 뒤에는 경제적 이익의 획득이 있었지만, 공개 문
서에는 한국 정부가 경제적 이익에 얼마나 관심이 많았는지를 엿볼 수 있는
것도 포함되어 있으나 한국이 얻은 경제적 이익의 전모를 밝히기에는 무리
가 있다. 또한 베트남에 군대를 파견한 참전국들은 베트남 정세를 협의하기
위해 1967년부터 1971년까지 매년 외상회의를 개최했었지만, 공개 문서에는
1968년의 제2차 회의와 1969년의 제3차 회의 관련 문서 몇 건만이 포함되어
있을 뿐이다.
이 글에서는 108건의 문서를 다음과 같은 몇 개의 주제로 나눠 문서에 담
긴 내용을 검토하고 그것이 가진 의미를 간략하게 소개하기로 한다.
①한국군의 베트남 파병과 미국
②한국의 월남 후방지원과 한월 경제협력
③참전국 외상회의
④베트남 정세와 파리평화협상
⑤한국군의 베트남전 철수
⑥사이공 함락과 한국 교민 철수
⑦기타
베트남전쟁의 명예로운 종결을 내세워 대통령에 당선된 미국의 닉슨 대통
령은 중국과의 화해를 모색하고 닉슨 독트린의 연장선상에서 주한미군의 부
분 철수도 단행했는데, 여기서는 공개 문서의 내용과 의미 파악에 도움이 되
는 범위 내에서 이러한 국제정세의 변화에 대해서도 언급할 것임을 덧붙여
둔다.
마지막으로 본론은 소주제별 기록물 내용과 개별 기록물 해제로 구성되어
있다. 전자에서는 주제별로 분류된 문서 가운데 중요한 것들을 중심으로 내
용과 의미를 소개했으며, 후자에서는 문서별로 문서의 내용과 배경, 의미, 특
징 등에 대해 일반인들도 이해할 수 있도록 가능한 한 상세하게 서술했다.
2. 주제별 기록물 내용
1)한국군의 월남 파병과 미국
케네디 사망 후 대통령이 된 존슨은 베트남에 대한 개입을 확대하면서 우
방국들에 대해서도 협력을 요청했는데, 이것이 ‘자유세계원조계획’ 또는
“More Flags Program”이라고 불리는 정책이다. 프랑스처럼 미국의 군사적
개입에 비판적인 국가가 존재하는 상황에서 베트남 문제는 미국만의 문제가
아니라는 것을 내외에 보여줄 필요가 있었던 것이다. 러스크 국무장관은 전
세계 미국대사들에게 보낸 1964년 5월 1일자 전문에서 동남아시아에서 공산
주의자들에 대항하기 위해서는 자유진영의 우방국들이 베트남을 지원하는
것이 중요하다면서 주재국 정부에게 지지와 협력을 요청하도록 지시했다.
이에 입각해 버거 주한미국대사는 정일권 총리(외무장관 겸임)를 만나 지
원을 요청했으며, 6월 한국은 월남 정부의 공식적인 지원요청이 도착하는 대
로 의무부대와 태권도 교관을 파견하기로 미국과 합의했다. 140명으로 구성
된 부대가 9월 11일 부산항을 떠나 22일 사이공에 도착했는데,1) 이것이 약 8
1) Foreign Relations of the United States(Hereaf
년 6개월 간 계속된 한국군의 베트남 파병의 시작이었다.
그 뒤 한국은 1965년에 2천 명의 비전투부대(비둘기부대)와 1개 사단의 전
투부대(맹호부대와 해병청룡부대)를, 1966년에 다시 1개 사단의 전투부대(백
마부대)를 추가로 파병했다. 한국의 파병규모는 미국을 제외한 다른 국가들
에 비해 대단히 큰 규모였는데, 한국의 파병은 경제적인 이익의 획득을 위한
것만은 아니었다.2) 박정희 대통령은 파병을 통해 쿠데타 이후 불편했던 대미
관계를 개선하고 미국의 전폭적인 지지를 획득할 수 있을 뿐 아니라, 파병이
더 많은 이익을 가져다줄 것으로 기대했던 것 같다. 즉, 그때까지 미국의 일
방적인 보호를 받아왔던 한국이 미국에 대해 독자적인 목소리를 내면서 보
다 대등한 한미관계를 구축할 수 있을 뿐 아니라, 한국의 국제적인 지위향상
에도 기여할 것으로 판단했던 것이다.
1965년 12월 전투부대의 추가파병을 요청받은 한국은 이듬해 1월 8일 “매
우 비현실적이고 불합리하며 미국의 재정능력을 초월한” “6-7억 달러에 달하
는 대가(tip)”라고 미국이 혹평했던 파병대가를 담은 리스트를 미국 측에 전
달했다. 미국 측은 1월 29일 이동원 외무장관에게 이에 대한 검토결과를 전
달했는데, 한국 측의 요구사항과는 거리가 먼 것이었다. 그 후 이동원 장관
과 브라운 대사 사이에 수차례에 걸친 교섭이 있었으며, 3월 7일 브라운 대
사는 양자의 합의사항을 담은 서한(3월 4일자)을 이동원 장관에게 수교했다.
이것이 소위 ‘브라운 각서’인데, 여기에는 파병을 대가로 미국이 한국에게 제
공하기로 약속한 경제적 군사적 지원 내용이 망라되어 있었다.3)
이번에 공개된 문서는 전투부대의 추가파병을 둘러싼 교섭 과정을 담은
것은 아니나 한국 정부가 ‘브라운 각서’의 이행 상황에 얼마나 민감하게 반
응했는지를 알 수 있다.
1966년 8월까지의 브라운 각서의 실천현황을 보고한 문서(관리번호
EA0002430, 이하 관리번호는 생략)는 대체로 원활하게 추진되어 대월수출이
증대되고 있다고 평가했다. 동시에 자연공급품목(Natural Source List)의 축
가확대, AID(미 국무부 산하의 국제개발처) 사업에의 적극 참여, 수출부문에
서의 기술원조 강화, AID 계류 중인 사업의 조기 승인과 협정 체결을 위해
서는 추가적인 교섭이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1967년 1월 17일(EA0002443)과
4월 20일(EA0002451)에도 브라운 각서의 이행상황이 구체적으로 보고되었다.
2) 한국군의 베트남파병에 따른 경제적 이익(베트남 특수)에 대해 연구한 박근호는 1965년부터 1972년까지 8년
간 약 10억 2,200만 달러에 달해 같은 기간 중에 일본으로부터 도입된 외자 총액(약 10억 8,900만 달러)에
필적했다고 주장한다. 朴根好, 『韓国の経済発展とベトナム戦争』(東京: 御茶ノ水書房, 1993).
3) 브라운 각서의 한국어 번역본은 국회도서관 입법조사국, 『戰後 美國의 對韓政策 - 사이밍턴委員會 聽聞錄
-』(대한미국 국회도서관, 1971년), pp.51-53.
브라운 각서는 한미 사이에 비밀리에 작성된 것이라 공표되지는 않았다.
그런데 1970년 2월 23일부터 1주일 간 미 상원 외교위원회의 미국의 안보조
약 및 대외방위공약분과위원회(사이밍턴 위원장의 이름을 따 ‘사이밍턴 소위
원회’로 불림)에서 브라운 각서의 내용이 공개되면서 파문을 일으켰다.
외무부는 브라운 각서의 공개에 반대했지만 불가피할 경우에는 비밀회의
에서 비공개로 공개할 것, 일반 공개의 경우에는 한미 양국 정부가 동시에
공표할 것, 공개 내용은 양국 정부가 사전에 협의할 것 등의 세 가지 원칙을
정하고 있었다. 또한 각서의 내용에 관해 외무부는 한국의 입장을 곤란하게
하는 내용을 삭제하거나 적절한 표현으로 바꿔 공개할 것을 희망했지만, 2월
24일 포터 대사는 브라운 각서의 사본을 동 위원회에 제출했다(EA0002817).
결국 한국군에 대해 미국이 수당과 전사자 보상금을 지급한다는 내용이 알려지면서 한국군이 미군의 용병이라는 비판이 제기도 했다.

한편, 1971 미 회계연도(FY1971) 군사조달법안을 심의하던 미 상원은 월남주둔 외국군(호주와 뉴질랜드를 제외한 한국, 필리핀, 태국군)에게 미국이 지급하던 수당(해외근무 및 전투 수당)이 미군 수준을 넘지 못하도록 하는 수
정안을 가결시켰다.
외무부는 수정안에 대해 유감을 표명함과 동시에 법안으로 확정되지 않도록 미 행정부가 가능한 조치를 취해줄 것을 요청하라고 주
미대사관에 지시했다(EA0002894). 한국군은 계급에 따라 월 37.5달러(이병)에서 300달러(중장)의 수당을 받았다. 1965년부터 1973년까지 파월한국군이 해외근무수당으로 받은 총액은 2억3556만 달러에 달하며, 이 가운데 약 83%인1억9511만 달러가 본국으로 송금되었다고 한다.4)외무부는 미국의 수정안 교섭 제의에 대비해 한국군을 철수하거나 감액부분을 한국 정부가 부담하는 방안을 고려하고 있었으나, 다행히 상하 양원 협의회에서 1970년 7월 1일 이전에 체결된 협정에는 적용하지 않는다는 것에합의함에 따라 한국군에 대한 수당 지불 중지 안은 좌절로 끝났다.
2)한국의 월남 후방지원과 한월 경제협력
1961년에 4천만 달러에 지나지 않았던 한국의 수출은 1964년에 처음으로
1억 달러를 넘었으며, 1965년과 1966년에는 각각 1억7500만 달러와 2억5천만
달러를 기록했고 1967년에는 3억2천만 달러로 급증했다. 경제성장률도 1960
년에는 2.0%였던 것이 1964년과 1966년 각각 8.3%와 13.4%로 상승했다.
이러한 한국경제의 고도성장을 뒷받침했던 것이 한국군의 베트남파병에
4)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 『통계로 본 베트남전쟁과 한국군』(2007년), pp.153-154.
따른 경제적 이익, 즉 베트남 특수였다. 전후 일본경제가 한국전쟁 특수에
의해 부흥에 성공했다는 점도 고려되었을 것이다. 1965년 비전투부대를 파병
한 이후 한국에서는 ‘한미월 3각 경제협력’이란 말이 널리 사용되었으며, 기
업은 수출가능성을 조사하기 위해 현지에 조사단을 파견했다. 정부도 1965년
4월 사이공의 대사관에 ‘대월경제협조단’을 설치하여 수출, 군수물자와 일반
물자의 군납, 노동자와 기술자의 진출 등을 모색했다.
한국의 베트남 특수에 관한 선구적인 연구를 수행한 박근호는 크게 경상
수지(수출과 물품군납)와 무역외수지(용역군납, 건설군납, 군인송금, 기술자송
금, 각종 특별보상금과 보험금)로 나눈 뒤 한국의 베트남 특수는 한국군의
파병 규모에 비례하는 형태로 증가했다는 점을 밝혔다.
이번에 공개되는 문서를 통해 한국의 베트남 특수와 이를 통해 긴밀해진
한월경제관계의 전모를 밝히는 것은 불가능하지만, 한국 정부가 얼마나 큰
기대와 관심을 가지고 있었는지는 알 수 있다.
대통령과 총리의 친서를 휴대한 민간사절단을 파견해 한국 정부는 대월교
역 증진과 주월미군 및 월남군에의 군납 확대 등을 통한 한미월 3각 협력의
강화 방안을 모색했다(EA0002297). 1965년 4월 8일 국무총리 주재로 열린 월
남후방지원 확대방안 검토회의에서는 미국의 대월 군사 및 경제원조 물자의
한국 내 가공과 조달, 3각 무역 등을 통한 5천만 달러의 국내유치라는 목표
를 제시하고 이를 위해 미국과 월남 당국과 적극적으로 교섭하며, 특히 5월
중순으로 예정된 박정희 대통령의 방미를 이용해 교섭이 한국 측에 유리하
게 실현될 수 있도록 준비한다는 것이 결정되었다(EA0002319).
또한 미국이 주월미군이 필요로 하는 물자를 일본에서 조달하고 있는 것
을 보고 한국이 제공할 수 있는 물품 확보, 트럭이나 항공기의 분해 수리 등
을 수주하기 위해 적극적으로 입찰에 참여하고, 한국군 전투부대의 파병을
계기로 이들 부대에 대한 병참지원 물자를 한국에서 조달할 수 있도록 미국
과 협의하는 문제도 검토되었다(EA0002336).
한편 1965년 11월 8일 월남의 키 수상이 한국을 방문했던 것을 계기로 11
월 10일 각료급 한월경제회담이 열렸는데, 이를 계기로 양국은 매년 각료급
경제회담을 갖기로 합의했다. 아쉽게도 이번에 공개되는 문서에는 1966년 1
월 사이공에서 개최된 2차 회담과 1969년 5월 티우 대통령의 방한 시 열린
개별각료회담의 관련 자료가 포함되어 있을 뿐이다.
1966년 1월 11일부터 3일간 열린 2차 한월경제협력회담에서는 한국은행의
사이공 지점과 보세창고 설치, 항공협정 체결 교섭의 개시 등이 합의되었다.
장기영 부총리는 미군사령관과 미국대사 등과 만나 BA 정책의 완화를 요청
했지만 구체적인 회답은 없었다.5) 다만, 베트남에서의 수송, 건설, 용역 등과
관련해 웨스트모어랜드 사령관으로부터 새로운 제안이 있었다면서 귀국 후
구체적으로 보고하겠다고 말했지만(EA0002399), 이번 공개문서에는 포함되어
있지 않았다.
1969년 5월 한월 정상회담과는 별도로 외무, 경제, 국방장관에 의한 개별
회담도 열렸다. 경제각료회담에서 한국 측이 통상진흥을 위한 수출입 업자의
등록 허용, 건설공사에의 한국 참여 확대를 위한 협력, 한국인 기술자와 현
지 제대 장병의 취업에 대한 우대조치 등을 요청한 것에 대해 월남 측은 구
체적인 회답은 피하면서도 긍정적인 반응을 보였다. 한국 측이 고콩 지구 수
리관개 기술조사를 위해 한국 정부가 30만 달러를 제공할 의사가 있다고 표
명하자 월남 측은 감사의 뜻을 표하면서 적극적인 지원 의사를 밝혔으며, 양
국은 신규 미군 용역계약을 위한 합작투자사업의 촉진과 항공협정의 수정에
도 합의했다(EA0002701).
또한 1970년 4월 사이공을 방문했던 최규하 외무장관은 월남 외상을 만나
한국의 월남원조, 월남 정부의 한국 기술자 및 전문가에 대한 대우, 양국 투
자 촉진을 위한 ‘투자 장려 및 보호 협정’ 체결 등을 담은 경제기술협력협정
에 가조인했다(EA0002849). 이 협정은 6월 초 서울에서 최규하 장관과 주한
월남대사 사이에 정식으로 조인되었다.
월남 재건 사업이나 각종 군납도 미국의 재원에 의해 실시되었던 점에 비
춰볼 때 미국과의 교섭이 매우 중요했다. 한국 정부는 미 국방부의 구매담당
자의 방한(訪韓)에 많은 기대를 걸었으며(EA0002381), 미국도 베트남에서의
공공사업, 보건, 피난민 정착, 교육, 재향군인 보도 등에 한국이 참여할 필요
가 있다고 보았지만, 재원확보나 언어 등의 어려움이 있었다.
또한 한국은 기술자와 군수후방용역단을 파견해 월남재건사업에 참여하는
문제를 미국과 협의하기도 했으며(EA0002452, EA0002455, EA0002545), 미국
과의 실무교섭이 원만하게 진행되지 못할 때에는 대통령에게 측면지원을 요
청하기도 했다. 브라운 각서 수교 후인 1966년 3월 20일 전투부대의 증파안
이 국회를 통과하자 한국 정부는 4월 수도사단 26연대를 먼저 베트남으로
보냈다. 이 후 한국 국내에서 베트남 정국을 우려하는 목소리가 커지면서 두
번째 전투사단(제9사단)의 파병이 늦어지지는 않을까 우려한 미국은 롯지 주
월대사를 한국으로 보내 예정대로 파병하도록 요청했다. 이때 주월한국대사
는 캄람 소도시 건설, 한국군 주둔 지역 내의 시설 건설, 항만 준설 및 하역
5) BA는 Buy American의 약자로 미국 정부는 국제수지 악화 방지를 위해 국방부와 AID가 물자를 조달할 때
외국상품과 비교해 가격이 약간 비싸도 미국 제품을 구매하도록 했던 정책을 말한다.
수송 등에 한국 기업이 더 많이 참여할 수 있도록 미국이 배려해주도록 대
통령이 롯지에게 영향력을 행사해줄 것을 대통령에게 건의했다.
주월한국대사는 주월한국군에 제공되는 전투식량(C-Ration) 가운데 한 끼
를 한국산으로 대체하는 데 미군이 합의했음에도 실현되지 않고 있다면서
이 문제에 대해서도 언급해 줄 것을 건의했다(EA0002319).
3)참전국 외상회의
1966년 10월 24-25일 필리핀의 마닐라에서 열린 베트남전 참전국 정상회의
의 정신을 계승하고 참전국 간의 단결을 대외적으로 과시하기 위해 미국 주
도로 참전국 외상회의가 만들어졌다.6) 첫 번째 회의는 1967년 4월 20-21일
워싱턴에서 열렸는데, 1968년의 2차와 1969년의 3차 외상회의 관련 문서가
이번에 공개되었다. 참전국이 철수하기 시작하면서 외상회의는 사이공 주재
참전국 대사회담으로 격하되었는데, 1971년 12월 사이공에서 열린 대사회담
관련 문서 하나가 함께 공개되었다.
1968년 4월 4일 제2차 외상회의가 뉴질랜드의 웰링턴에서 개최되었다. 이
회의에 임하는 한국의 목적은 두 가지였다. 하나는 1968년 1월에 있었던 북
한의 도발행위의 위험성과 한국의 입장을 참가국들에 설명하고 지지를 호소
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부분적인 북폭 중지와 대화 제의를 담은 3월 31일
자 존슨 대통령의 성명에 대해 러스크 국무장관으로 직접 설명을 듣고 이에
관해 참가국과 논의하고 각국의 입장을 확인하는 것이었다.
회의에 참가한 최규하 장관은 기조연설을 통해 북한의 청와대 습격사건과
푸에블로호 나포 등을 강력하게 비난한 뒤 북한의 침략행위는 베트남에서의
구정공세(Tet Offensive)와 관련이 있다면서 지역차원의 방위문제에 참전국들
이 공동으로 대처할 필요가 있다고 강조했다. 또한 참전국들은 베트남 문제
의 평화적 해결을 위해 단결해야 하며 공산 측의 기만적인 평화제의를 경계
해야 하고 베트남 문제의 해결 전(全) 과정에 참여해야 한다는 데에도 주의
를 환기시켰다(EA0002553).
참전국 외상들은 최 장관이 표명한 한국의 입장을 지지하고 존슨 대통령
의 성명이 평화를 향한 중요한 조치라고 환영했으며, 월맹의 병력이 북으로
철수하고 침투를 중지하면 연합국도 철수할 것이라는 마닐라 정상회의 결의
를 재확인했다(EA0002554, EA0002555).
회의를 마친 최 장관은 귀국 길에 방콕에 들러 동남아 공관장 회의를 주
6) 참전국 정상회의는 박정희 대통령의 주도로 만들어졌다고 할 수 있는데, 이에 대해서는 졸고를 참조할 것.
“한국군의 베트남 파병과 박정희 정부의 외교적 이니셔티브: 한․미 행정협정, ASPAC, 참전국 정상회담,” 『해
외파병사 연구총서 제2집』(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 2007), pp.127-196.
재했는데, 1968년도 수출목표인 9500만 달러 달성은 무난하며 수출확대를 위
해서는 수출품 양산체제를 확립하는 것이 긴요하다는 건의가 채택됐다
(EA0002557). 당시 한국 정부가 베트남 특수에 얼마나 큰 관심을 갖고 있었
는지를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제3차 참전국 외상회의는 1969년 5월 22일 태국의 방콕에서 열렸는데, 베
트남전쟁을 둘러싼 상황이 전년도와는 크게 달라졌다. 1968년에 치러진 미국
대통령 선거에서 공화당의 닉슨이 당선되었는데, 국방장관에 임명된 레어드
는 1969년 3월 7-10일의 남베트남 시찰과 벙커 대사와의 정책협의를 거쳐 미
지상군 철수라는 기본방침에 입각한 새로운 베트남정책을 내놓았던 것이다.
회의 직전인 4월 18일의 기자회견에서 닉슨 대통령은 미군과 북베트남군
의 동시철수, 베트남군의 능력 강화, 파리회담의 진전 등을 미군 철수의 조
건으로 제시한 바 있기 때문에 미국 측이 어떤 입장을 표명했지 관심이 모
아지고 있었다.
회의 폐막과 함께 발표된 공동성명에서 각국은 북한의 침략행위를 규탄하
면서 한국의 노력을 지지할 것을 확인하고, 한국의 서울주재 참전국대사정례
회의 제안을 환영한다고 밝혔다. 또한 베트남에서의 군대 철수와 관련해서
상호가 수락할 수 있는 일정에 입각해 동시에 진행되어야 하며, 공산 측은
라오스와 캄보디아로부터 군을 철수해야 한다는 데에도 의견을 같이 했다
(EA0002690).
한 가지 주목해야 할 것은 한국이 오키나와의 미군기지 이전문제를 공동
성명에 반영할 것을 제안했다는 점이다(EA0002691). 1968년 5월27일 워싱턴
에서 열린 제1차 한·미 국방각료회담에서 최영희 국방장관은 미일 사이에 반
환교섭이 이루어지고 있던 오키나와의 미군기지를 한국으로 이동하는 것을
환영하며 한국은 필요한 토지를 제공할 용의가 있다고 표명한 적이 있는데,
유사한 내용을 미국 측에 제안하고 공동성명에 포함시킬 것을 요구했지만
미국 측의 반대로 실현되지 않은 것으로 판단된다.7)
또한 1969년 9월 20일 뉴욕에서 열린 비공식 외상회의에서 미국은 ‘베트남
전쟁의 베트남화’ 계획에 대해 참전국에 설명했다. 미국은 모든 책임을 미군
에서 월남군으로 전환하려는 것이 아니며 월남군의 증강 상황을 보면서 단
계적으로 실시될 것이기 때문에 미군의 철수가 연합군의 안전을 위태롭게
하는 것은 아니라고 이해를 구했다(EA0002740, EA0002757).
7) 1969년 6월 서울에서 열린 2차 한․미 국방각료회담에서는 오키나와의 이전대상 지역으로 ‘제주도’가 구체적으
로 거명됐다. 임충식 국방장관은 “제주도에 공군기지와 해군기지를 만들어 줄 것을 제의한다. 제주도에 만드
는 것이 여러 가지 면에서 실질적이라고 생각한다”고 제안했지만, 패커드 국방차관은 “(임 장관의) 제의에 감
한편, 1971년 12월 15일 사이공에서 열린 대사회담에서 월남 측은 월남군
의 현대화계획이 원활하게 추진되고 있지만 연합군의 철수 이후 어려움이
많다면서 계속적인 지원이 필요하다고 호소했다(EA0003053).
미군이 철수하면서 연합군도 단계적으로 병력을 철수하기 시작했는데,
1971년 1월 11일 박정희 대통령은 한국 정부가 주월한국군의 단계적인 감축
을 고려하고 있음을 처음으로 밝혔다. 이에 대해서는 후술한다.
4)베트남 정세와 파리평화협상
1968년 1월 30일 월남 전 지역에서 공산 측의 대규모 공세가 있었다. 구정
에 맞춰져 감행된 공세(Tet Offensive)로 사이공의 미국대사관이 점거되기도
했으며, 2월 18일부터는 사이공을 중심으로 2차 공세가 시작되었다. 존슨 대
통령은 미군의 증파를 시사하기도 했지만, 뉴햄프셔 주의 대통령 예비선거에
서 자신의 베트남정책을 비판했던 매카시에게 근소한 차로 패배한 데 이어
로버트 케네디가 출마를 선언하면서 사면초가에 직면하게 됐다.
결국 존슨 대통령은 3월 31일 대통령 선거 불출마를 선언했으며, 동시에
북폭의 부분적인 중지와 공산 측에 대해 교섭을 제의했다. 이로써 베트남전
쟁은 전쟁과 동시에 당사자 간의 직접교섭이라는 새로운 단계로 접어들었다.
미국에 이어 두 번째로 많은 병력을 파병한 한국으로서도 미국과 북베트남
사이의 평화협상에 관심을 갖지 않을 수 없었다.
우탄트 유엔 사무총장도 베트남전쟁의 평화로운 해결을 위해 중재의사를
밝히면서 미국과 북베트남과 접촉했지만 성과가 없었다(EA0002540). 곡절 끝
에 5월 13일 파리에서 미국과 북베트남 사이의 협상이 시작되자 한국은 주
미대사를 통해 ①예비접촉 진척상황을 프랑스의 한국대사와 협의할 것, ②회
담이 본격화되면 한국의 완전한 참여에 동의할 것, ③모든 참전국의 참여가
불가능할 경우 미국과 함께 한국이 참전국 대표로 참여할 것 등을 미국 정
부에 요청했지만 미국의 반응은 부정적이었다. 사이공 정부의 참여방식에 미
국의 관심이 집중되어 있었기 때문에 참전국 대표의 참여문제는 고려사항도
아니었다(EA0002561).
존슨 대통령이 10월 31일 북폭의 전면중지와 사이공 정권과 민족해방전선
(NFL)의 회담 참여를 발표하면서 파리 평화협상은 새로운 국면에 접어들었
다. 한국 측도 상황의 변화를 예의주시하고는 있었지만, 평화협상에서 한국
정부가 어떤 역할을 할 것인가에 대해서 구체적으로 검토하고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조홍만 의원 등의 질의서에 대한 정부의 답변서에 나타나 있듯이
한국 정부는 참전국의 본회담에의 참가, 월맹군의 완전한 철수와 월남에서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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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호     글 제 목  작성자 작성일 조회
협조. 프레이저보고서" 브라운각서" 구굴번역기 이정범유뷰브 2020/10/02 00:16 218
협조. 브라운각서 한국군 군사급여와 전투수당 공개합니다 한국베인전 2020/05/26 14:03 377
반대. 정부가 숨겨노은 브라운각서 한국군의급여 공개합니다. 한국베인전 2020/02/27 23:36 647
반대. 월남참전군사급여 한국베인전자료에 의하여 전명수전우가 공개한다. 한국베인전 2020/01/13 19:08 538
감사 2020년도 년회비 받습니다 (협조부탁드립니다) 2 한국베인전 2020/01/04 08:59 616
감사 우리모두청와대해외근무수당과퇴지금 브라운각서공개하고 국회계류중인 전투수당법안 즉각 통과하라고 동의하려갑시다. 34 한국 베인전 2018/03/28 19:19 3593
감사 한국베인전에 가입한 일반회원님에게 정회원가입을 부탁드립니다 22 한국베인전 2018/11/26 20:53 9225
6469 감사 정부는핏값돌여주고 박근혜 최순실은익 재산압수하라. 6 전투급여 추진위원회 2020/11/28 18:18 110
6468 나뿐놈. KBS 역사스페셜 – 월남파병, 박정희의 승부수였다 7 이정범 2020/11/27 19:05 205
6467 안맞다. 베트남 전쟁 - 한국군이 왜 살인마 집단인가? 다시보기 2020/11/26 19:33 153
6466 바보. 훈련수당도 받아고 해외수당도 모던 자유세계 군인과 동일하게 받았다. 1 딱지 2020/11/25 01:08 250
6465 삭제해. 브라운각서도 없이 재판한는 이자의행동은? 5 한심한자 2020/11/23 20:53 203
6464 나뿐놈. 이검은 부정한돈 우리 의피눈물값은 어디에 숨겨저있냐? 5 최상영 2020/11/22 12:34 285
6463 찬성.    Re..[MB 재수감 현장 성명 발표] MB, 최순실 불법은닉재산 환수! 데이비드윤 송환! 최상영 2020/11/22 12:40 154
6462 나뿐놈.    Re..비밀계좌의 온상이었던 스위스 최상영 2020/11/22 12:46 143
6461 미처. 김종대 의원 등, 베트남전서 한국군 가해사건 조사 특별법 발의 1 미처 2020/11/21 13:37 158
6460 나뿐놈. 김성웅이가 확실한전투수당자료도 없이 재판하여 폐소하기 직전에처 해있다. 5 바보다. 2020/11/21 11:19 152
6459 찬성. 카톡의친구님!이 보내온글 1 최해영 2020/11/21 00:35 135
6458 하하. 월남전에 파병됐던 군인은 군인연금법상 3배의 복무기간을 인정해줘야 한다는 법원 판결이 나왔 해병김차웅 2020/11/20 09:44 186
6457 미처. 재미 천경수 목사 펌 글 보내고 가혹한 시련을 당하여 글 드리 6 전주 전명수 2020/11/19 19:54 175
6456 하하.    Re..재미 천경수 목사 펌 글 보내고 가혹한 시련을 당하여 글 드리 참내 2020/11/20 17:22 62
6455 미처. 조직적 집회방해 시정하고 사과하라! 201119 전우방송 2 박우영유뷰브 2020/11/19 19:49 109
6454 퇴출. 직업적으로 고엽제 단체에 기생하고 있는 기생충들 1 참전전우 2020/11/17 17:00 271
6453 환영. 충분한 돈을받아내라 5 백마파랑새 이정범 2020/11/16 21:03 329
6452 환영. 고엽제 피해자 돕기운동을 1 백마전우 파랑새 2020/11/16 19:46 205
6451 미처. 가슴을치면서 통곡할일이다. 2 금태남글 2020/11/16 14:05 261
6450 감사 영웅들의눈물 영화제작 예고편 1 최상영 2020/11/15 12:13 199
6449 환영. 박우영믿지 마세요. 1 카톡에온 김교복 글 2020/11/14 21:39 156
6448 미처. 피와보물 한국군병사들에게 핏값을 적게주었다. 3 김차웅 2020/11/13 23:20 218
6447 환영. *대국민 대정부 집회방송 호소문! *전우방송 201112 [두번후안내] 1 박우영유부브 2020/11/12 22:32 2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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