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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세상 속 이 세상]서서히 찾아오는 죽음 고엽제
ㆍ‘베트남의 눈물’은 결코 남의 일이 아니다 경북 칠곡군 왜관읍. 대학 들어가기 전 3년 동안 막노동으로 생계를 유지할 무렵 왜관읍에서 그리 멀리 떨어져 있지 않은 성 베네딕도 수도원 공사 현장에서 겨우내 일한 적이 있다. 뉴스에서 이곳에 미군이 ‘에이전트 오렌지(Agent Orange)’라는 고엽제 수천 ㎏을 매몰했다는 기사를 접하고 나서야 왜관읍 근방에 미군 기지가 있었다는 기억이 떠올랐다. ■ 서서히 찾아오는 죽음, ‘슬로 불릿’ 미국이 베트남의 정글에 뿌린 에이전트 오렌지의 양은 5만t에 이른다. 미국이 베트남전쟁에서 고엽제를 사용한 것은 주요 전투가 밀림이 우거진 정글에서 치러졌기 때문이다. 미군은 적의 은닉처가 되고 작전에 장애가 되는 밀림을 파괴하기 위해 에이전트 오렌지 같은 강력한 화학 제초제들을 공중 투하했다. 이른바 ‘랜치핸드(ranch hand·목장 일꾼)’ 작전이었다. 이 작전은 항공기를 이용해 정글 위 40m 상공을 저속 비행하면서 4분 이내에 폭 80m, 길이 16㎞의 정글을 완전히 말려 죽이는 데 사용됐다. 한국은 1965년부터 73년까지 미국에 이어 두 번째로 많은 32만명을 베트남에 파병했다. 사전에 어떤 경고도 받지 못했던 장병들은 고엽제를 몸에 바르면 해충을 방제해주는 효과가 있는 것으로 알았다. “철모에 듬뿍 퍼 담은 가루 고엽제를 가슴에 안고 비료처럼 뿌려대는 시범을 보이고는 짝짝짝 박수를 받기도 했을 정도”로 고엽제의 영향에 대해서는 무지했다. 한국에서 고엽제 후유증은 91년 호주에 거주하는 교민이 내한해 “고엽제 피해로 죽어가고 있다”고 호소하면서 알려졌다. 정부도 93년 관련 법률을 만드는 등 대책을 마련하기 시작했고, 국가보훈처에서 고엽제 피해자 보상·치료를 실시하게 됐다. 고엽제로 인한 국내 사망자는 현재에도 한 해 200여명에 이르는 것으로 추산된다. ■ DMZ와 캠프 캐럴 고엽제 피해는 베트남전 참전 군인들만의 문제일까? 60년대 말 비무장지대(DMZ)에서 복무했던 제대군인이 국가보훈처 보훈심사위원회에서 고엽제 후유증을 앓고 있다는 심사 결과를 받았다. 지난해 12월 말 현재 DMZ에서 복무했던 제대군인 중 554명이 고엽제 후유증을 호소하고 있으며, 심사 결과 이 중 14명이 후유증을, 65명이 후유의증을 앓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99년 12월 <함께 사는 길>에 게재된 “비무장지대 고엽제 살포”란 글에 따르면 “68년 4월부터 비무장지대에 …(중략) 당시 뿌려진 고엽제는 ‘에이전트 오렌지’이며 살포한 분량이 무려 140만ℓ, 드럼통으로 7000여개”에 이른다고 한다. 살포작업에는 주로 한국군이 동원됐다. 한 방송사는 2년 동안 총 7만여명은 동원되었을 것이라고 보도했다. 고엽제의 독성을 모르는 병사들은 맨손으로 살포작업에 동원됐으며, 더운 날씨에 옷까지 벗어던지고 고엽제의 안개 속에 몇 시간씩 무방비로 노출된 적도 있다고 한다. 미국은 당시 이미 고엽제의 위험성을 알고 있었다. 64년 미국과학자연맹은 미국이 고엽제로 생화학무기를 실험하고 있다고 비난했다. 미군 고엽제 피해소송을 담당한 뉴욕주 법원의 판결문에는 ‘65년 백악관 회의에서 이미 고엽제가 인체에 끼치는 유해성에 관해 논의했다’는 증언이 포함돼 있다. 주목해 보아야 할 것은 베트남과 한국 DMZ에서 사용된 에이전트 오렌지의 진상이 밝혀지는 과정에서 한 번도 우리 정부가 주도적으로 나선 적이 없다는 사실이다. DMZ 고엽제 살포 사실은 68년 당시 동두천에서 복무했던 주한미군 병사가 99년 미 정부를 상대로 소송을 내 고엽제 후유증 피해보상판정을 받음으로써 처음 확인됐다. 이번 캠프 캐럴 사건을 보도한 미 KPHO-TV는 “매몰된 고엽제로 인한 지하수 오염 가능성”이 있다”며 “이런 화학물질을 제거하는 데 50년이 걸릴 수도 있다”고 보도했다. 그런데 한국 정부나 언론의 태도는 어쩐지 미온 적이다. 우리 정부가 이 사건의 진실을 밝혀내고 적절한 보상을 받아낼 수 있을까? 진실을 밝혀내기도 쉽지 않겠지만 설령 밝혀지더라도 미국의 사과와 보상을 받기까지의 과정은 결코 쉽지 않을 것 같다. 이미 밝혀진 DMZ 고엽제 후유증 환자들에 대해 미국과 한국 정부는 모두 법적 보상을 거부하고 있다. 지금 한국 국민들의 입장은 혈맹인 미국보다, 한때 적으로 싸웠던 베트남 국민들의 입장과 더 많이 닮아 있다. ■ 글 전성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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