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은 결코 일어나서는 안됩니다”

인터뷰-‘베트남 참전기’ 영문 일기로 책 펴내는 김 풍 씨


# 1968년 12월 23일 행군을 시작하자마자 첨병 소대에서 무전히 급히 왔다. 계곡에서 아침을 지어 먹고 있는 베트콩 15명을 발견했다는 무전이었다.

중대장 이민엽 대위는 “모두 움직이지 말고 기다리라”는 명령을 남기고 선발대 쪽으로 달려갔다. 잠시 후 총성이 계속 울렸다. 추격하던 우리 측이 기습당해 중대장과 분대장 2명이 전사하고 2명은 중상을 입는 큰 피해를 입었다.

부상병은 버려도 총은 버리지 않는다는 베트콩들이 총을 버리고 도망쳤다. 그 총의 방아쇠 부분에는 단발과 연발이 쓰인 한글이 선명한 북한제 AK 소총이었다. 베트남 이곳에서 북한과 간접적인 전쟁을 하고 있다고 생각하니 마음이 더욱 우울했다.

# 68년 12월 24일 대대장은 중대장 전사 소식을 듣고 통곡했다고 한다. 장래가 촉망되는 26세의 아끼는 중대장이어서 대대장은 더욱 슬퍼했다. 카랑카랑 패기 넘치던 중대장의 목소리가 아직도 귓전에 생생하다. 오늘은 12월 24일 크리스마스 이브. 미군의 공수지원을 받을 수 없어 더 이상 작전을 지속할 수 없다. 밀림을 내려다보면서 전사자들의 넋을 추모하는 묵념을 올리고 철수준비를 했다.

우리들의 가슴에는 어젯밤 쏟아진 비보다 더 심한 소리를 내면서 비가 내렸다. 전사자들이 헬기에 실려 멀리 사라져갔다. 그들이 한 줌의 재로 고국에 돌아간다는 소리에 모든 전우는 소리를 지르며 울고 싶었다. 전사한 전우의 이름으로 다시 총을 들었다. 베트남 전쟁이 한창이던 68년 9월 12일부터 70년 5월 18일까지 생생한 전장 체험을 일기로 기록하고, 그 기록을 영문책으로 엮고 있는 베트남 전쟁의 노병이 있다.

육군9사단 독수리연대 2대대 6중대 화기소대 소총수로 베트남 전쟁에 참전했던 김풍(63·전북 군산시 성산면 여방리·사진) 씨. 공주사범대 영어교육과 2학년에 재학 중이던 그는 68년 1월 육군38사단 군수처 행정병으로 근무하다 베트남 전쟁에 자원, 참전하게 된다.강원 화천군 오음리 훈련장에서 한 달간 파병 교육을 받고 68년 9월 12일 부산항을 출발, 5박6일 만에 베트남 나트랑 항구에 도착한다.

일기는 바로 부산항을 출발하는 그날부터 볼펜과 만년필로 포켓용 작은 수첩과 노트에 매일매일 한글과 영어 메모 형식으로 기록해 나갔다. “원래 글을 쓰고 메모하기를 좋아했습니다. 베트남 전쟁이 한창이던 그 당시에는 또래 친구들이 많이 자원 입대를 했습니다. ‘전쟁이란 과연 어떤 것인가’ 한번 겪어 보고 싶은 젊은 패기와 도전정신이 넘치는 20대였습니다. 특별히 두려움은 없었습니다.”

한 달에 한 번씩 15일 정도 작전이나 전투에 나갔다. 그때마다 전장에서 메모해 부대에 돌아와 정리했다. 그는 미군들의 최대 전략적 요충지였던 캄란베이를 방어하면서 전투임무를 수행하는 남방기지 독립중대 소대에 소속돼 있었다. 전장의 최일선에서 적지 깊숙이 매복작전과 전투를 수행해야 하는 그야말로 생사를 넘나드는 위험한 임무였다.

“68년 12월에 나갔던 승마 15호 베트콩 소탕 대대작전은 지금도 잊혀지지 않습니다. 그 전투에서 앞길이 창창하던 이민엽 중대장이 베트콩들의 7발 총탄을 맞고 전사했습니다. 황창호·김차삼 하사도 함께 전사했습니다. 소대원들의 등에 업혀 죽어간 전우들도 있었습니다. 그 당시 참혹했던 전쟁의 상흔들은 아직도 악몽으로 되살아나곤 합니다.”

21개월간 베트남 전쟁에 참전하고 살아 돌아온 그는 11사단에서 육군병장으로 70년 9월 전역했다. 74년부터 99년까지 고향인 군산에서 고등학교 영어교사를 하다가 전쟁 후유증으로 온 건강 악화로 명예퇴직을 해야만 했다. 그는 고엽제 고도 후유 장애 판정을 받았다. 퇴직 후 과거를 조금씩 정리해 나가다 우연히 서재에서 베트남 전쟁터에서 썼던 손때묻은 빛바랜 일기장을 발견했다.

전쟁의 실상이 그대로 묻어났다. 정말로 뛰는 가슴으로 수없이 읽고 또 읽었다. 99년 3월 그때부터 본격적으로 정리를 시작해 지금은 200쪽에 가까운 어엿한 영문책으로 출판을 앞두고 있다. 올해 중반쯤 펴낼 예정이다. 사선을 넘나들며 생사고락을 함께했던 40여 명의 소대원 회고담이 들어가는 마지막 5장을 정리하고 있다.

책 제목은 ‘사이공 데플람(가제)’으로 잡고 있다. ‘아름다운 사이공’이라는 베트남말로 전쟁 당시 현지 주민들이 가장 즐겨 불렀던 노래 제목이다. 베트남판 서울의 찬가다. 부제는 ‘베트남 1969년’이라고 잡아 놓고 있다.제1장은 베트남의 정치·경제·사회·문화·지리·환경과 함께 인도차이나 전쟁에서 베트남 전쟁으로 전개되는 과정, 그리고 한국군 참전 과정을 자세히 소개하고 있다.

제2장은 68년 9월 12일부터 70년 5월 18일까지 참전 일기를 영어로 실었다. 제3장은 파리협정을 포함해 베트남 전쟁이 어떻게 끝났는지 자세히 썼다. 제4장은 베트남 전쟁은 과연 우리에게 어떤 전쟁이고, 무엇을 얻고 느꼈는지, 우리 후세에게 주는 교훈은 무엇인지 쓰고 있다. 그 당시 전쟁터에서 찍었던 생생한 사진들도 함께 실린다.

그는 이 책을 쓰기 위해 64년 9월 22일부터 73년 3월 23일까지 31만2853명의 한국군 베트남 파병 역사를 따로 공부하기도 했다. 군산에서 서울까지 올라와 각 신문사를 찾아 다니면서 베트남 전쟁 관련 기사들을 스크랩하고 관련 책들을 사서 탐독했다.

“베트남 전쟁이 왜 일어났으며 어떻게 전개됐는지, 그리고 우리는 무엇을 얻고 잃었는지, 우리는 왜 싸웠는지, 그 결론은 어떻게 났는지, 일목요연하게 정리하고 후손들에게 알려주고 싶었습니다. 가장 많이 참전한 미군을 비롯한 외국인들에게도 한국인이 바라본 객관적인 시각을 들려주고 싶었습니다. 베트남 전쟁에서 피를 흘린 참전 전우와 그 가족, 친구들, 그리고 베트남 전쟁에 관심 있는 사람들에게 조금이나마 도움이 됐으면 합니다. 물론 현역 후배 군인들도 선배들이 피흘리며 싸웠던 전장의 실상을 정확히 알았으면 합니다.”

처음에는 40년 전에 썼던 일기가 세상에 빛을 보는 느낌이었다. 하지만 정리하면 할수록 우리 군의 최초 해외 파병에 참전했다는 역사적 소명과 사명의식, 자부심으로 바뀌었다. 베트남 전쟁에 대한 이런 저런 얘기들이 많지만 그래도 한국군은 현지 주민들을 위해 학교와 고아원을 지어 주고 대대적인 대민지원 활동을 펼쳤다고 당시를 회상했다.

태권도 교관을 파견해 청소년을 지도하고 베트남 군인들을 훈련시키기도 했다. 그때는 정말로 순수하게 도왔으며, 그러한 도움이 현재 한·베트남 간 좋은 관계로 결실을 맺고 있다는 큰 자긍심을 느끼고 있다.

“베트남 전쟁에 대한 많은 얘기가 있지만 한국군은 세계 평화와 반공 전선에서 싸웠습니다. 사실 한국 경제 부흥에도 많은 도움을 줬습니다. 미국의 베트남 전쟁은 사자와 모기와의 싸움이었습니다. 아무리 강한 사자라도 결코 모기를 이길 수 없었습니다. 다시는 이 지구상에 전쟁이 일어나서는 안 됩니다. 전쟁이 일어나면 싸우는 군인들도 피해를 보지만, 가장 비참해지고 고통받는 것은 바로 힘없는 나라의 국민들입니다.”

김씨를 비롯해 20대 젊은 나이에 나라를 위해 머나먼 베트남 전장을 누볐던 육군9사단 독수리연대 2대대 6중대 화기소대원들. 손은남(66·학군4기·고려대 농학과 졸업) 소대장을 중심으로 지금도 40년 전 전쟁터에서 맺은 끈끈한 전우애를 인연으로 정기적인 모임을 갖고 봉사활동도 펼치고 있다.

크고 작은 후유증에 시달리고 있지만 나라를 위해 전쟁에 참전했다는 자부심은 그 누구보다 대단하다. 김씨를 인터뷰하면서 11일 오전 서울 서초구 한 식당에서 만난 14명의 소대원은 지금도 손 소대장에게 “백마”구령의 힘찬 거수경례를 올렸다. 분기별 모임에 참석하기 위해 부산·광주·군산·창녕 전국 각지에서 올라온다.

생사고락을 함께했던 40명의 소대원 중 3명은 이미 세상을 뜨고 1명은 독일로 이민갔다. 소대원들은 지금까지도 소재 파악이 안된 10여 명의 전우를 찾기 위해 지도상에 본적지까지 표시해 가면서 전국을 누비고 있다. 정부 차원에서 참전용사 모임을 활성화하고 신원을 확인할 수 있는 배려를 해 줬으면 하는 바람도 나타냈다. 그런 차원에서 김씨도 책에 모두 실명을 쓰고 있다.

올해는 자신들이 싸웠던 베트남 현지를 죽기 전에 다시 한번 찾을 계획이다. “우리는 베트남 전장에서 죽은 전우들 덕분에 살아 돌아왔습니다. 누군가는 반드시 역사를 위해 이 전쟁을 정리할 책무가 있습니다. 그래서 살아 돌아온 전우들은 먼저 간 전우들의 삶까지 살아야 한다는 ‘산 자의 도리’를 죽는 순간까지 결코 잊지 않을 것입니다.”

사진설명:40여 년 전 베트남 전장을 누볐던 육군9사단 독수리연대 2대대 6중대 화기소대원들이 베트콩 탐색작전을 위해 헬기 탑승을 기다리고 있다. 앞줄 맨 오른쪽이 김풍 씨. 필자 제공

2009.02.12 글=김종원·사진=김태형기자 kjw8619@dema.mil.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