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o, 211
이름: 최상영
2016/9/3(토)
조회: 1459
베트남 전쟁 최근 수정 시각 : 2016-08-21 11:50:25+0900  
 

베트남 전쟁/한국군

최근 수정 시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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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항을 준비하는 맹호부대청룡부대 장병들.[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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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병대 청룡부대의 통신병. 깨알같은 정조준 금지구역[2]차라리 베트남어로 쓰지 이렇게 Mục tiêu khu vực cấ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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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를 구해내고 있는 육군 백마부대 장병들. 미군인 줄 알았던 사람들 많을 것이다.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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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Vietnam 잡지에 소개된 청룡부대. 1968년 쾅나이성에서 찍힌 사진.

1. 개요
1.1. 사실 그 이전에...1.2. 파병 당시의 사정과 명분
2. 파병 부대3. 주요 전투 기록4. 베트남전에 대한 평가
4.1. 베트남전 발발 당시의 평가4.2. 현대의 평가
5. 파월 한국군에 대한 긍정적 평가
5.1. 파월 한국군에 대한 서방의 시선5.2. 인명 피해5.3. 참전용사 대우 문제
5.3.1. 이중배상금지5.3.2. 전투는 했지만 전투수당은 주지 않겠다
5.4. 그 밖에
6. 부정적 평가 및 논란7. 관련 인물8. 기타

1. 개요[편집]

베트남 전쟁은 한국과도 연관이 많다. 당시 전투 병력이 모자라게 된 미군주한미군 제7사단을 빼내서 베트남으로 보냈고, 곧 이어 제2사단마저도 빼내서 보내려 하고 있었다. 미군이 빠져나가 전력에 공백이 생겨 벌어질 북한의 침공이 두려웠던 박정희 정부는 미군 측에 먼저 "우리가 너네 대신 병력을 보내줄게!"라고 제안을 하게 된다. 미국이 이를 승낙하여 우리나라도 수도사단(맹호부대), 해병 2여단(청룡부대)의 전투 병력을 보내고, 뒤이어 9사단(백마부대)을 파견한다.[4][5] 그렇게 1965년부터 1973년까지 8년에 걸쳐 5만명의 병력[6]에 달하는 대한민국 국군 장병들이 베트남 전쟁에 참가하여 56만 3387건의 작전을 치렀다.

1.1. 사실 그 이전에...[편집]

사실 베트남전이라고 하면 모두 북베트남 vs 미국 + 남베트남(+ 한국군 + ...)의 전황이 이루어졌던 2차 인도차이나 전쟁만을 생각하지만, 1946년부터 1954년까지 벌어진 1차 인도차이나 전쟁에도 한국에서 참전하려는 의사를 보였다고 한다.

1954년 1월 막 6.25 전쟁을 마친 이승만 정권은 1개 사단을 파병할 의사를 보였는데, 이는 이승만 정권에서 제시한 명분처럼 '6.25 전쟁 해외 파병에 대한 보답'뿐만 아니라 해외 파병을 통해 6.25 전쟁 이후 국군의 위상을 살리고 미국에 대한 발언권을 높이기 위한 행동이었다. 그러나 이 제안은 미국이 남한에 주한미군 체제를 구축하고 대규모의 무상 지원을 하는 와중에 한국 군대를 해외 파병하도록 할 경우 여론의 반대가 일어날 것을 의식해서 중단시켰다고 한다.

하지만 1954년 6월 제네바 회담에서 베트남 문제가 미국의 예상과는 달리 공산권의 세력이 인도차이나 반도에서 확고히 자리잡는 쪽으로 흘러가자 미국은 이승만 정권과 협의해 한국군 3개 사단의 파병을 고려했다. 하지만 식민지 문제의 당사국인 프랑스 측에서 자신감이 넘쳤는지이를 거부해 한국군의 파병은 이루어지지 않았다.[7]그후 탈탈 털리자 바로 미국 바짓가랑이를 붙잡았다

1.2. 파병 당시의 사정과 명분[편집]

월남전 파병 결정 당시 미국이 단순히 전황이 안 좋아서 주한미군을 빼려고 한 것이 아니라 다른 동맹국에게 모조리 외면을 받았기에 한국을 압박해서 동맹군을 뜯어냈다는 주장이 있다. 이런 주장 중에는 미국의 압박을 받은 만큼 그 당시의 한국 입장에서 달리 선택의 여지가 없었기에 할 수 없이 파병을 했다는 주장도 있다.

사실 어느 정도 일리있는 이야기다. 이제는 다 알려진 사실이지만 베트남전에 투입된 병력과 전비는 상상을 초월했다. 전쟁 중에 미국 행정부가 교체되면서 후임 국방장관이 확인해 본 바에 따르면 미행정부는 의회 승인 없이 유럽 주둔군 등 타 지역에 투입되어야 할 물자와 자금까지 베트남에 쏟아부었다. 한마디로 한가하게 한국 사정 봐줄 시기가 아니었다는 이야기다. 한국군 일부가 가지 않았다면 미군이 더 많이 빠졌을 것이다. 그리고 주한미군의 역사를 보면 알겠지만, 한 번 빠져나간 병력이 다시 돌아온 적은 없었다.

또한 베트남 파병은 쿠데타로 정권을 장악한 군부세력이 미국의 지지를 획득해서 보장받기 위한 조치였다는 설이 있다. 1961년 11월, 5.16 군사정변 직후에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의 자격으로 미국을 방문한 박정희가 존 F. 케네디 대통령을 만난 자리에서 미국이 원한다면 병력을 월남에 파병할 수 있다고 제안한 것이다. 하지만 미국은 한국군이 월남에 파병되면 중국과 소련을 자극할 것이라 우려했고 이를 거절했다. 미국 정부는 경제원조를 약속하면서 사실상 군사정부를 승인하였다. 그리고 1963년 국민의 직접 투표로 치뤄진 제5대 대통령 선거에서 윤보선을 누르고 박정희 대통령이 당선되면서 제3공화국이 출범하였다.

그러나 월남전 상황이 시궁창으로 흘러가면서 미국의 입장은 달라졌다. 1965년 2월에 케네디를 승계한 미국 대통령 린든 존슨은 박정희를 미국으로 초청해 성대한 퍼레이드까지 해주면서 한국군의 전투병력을 파병해줄 것을 요청했다. 린든 존슨은 1개 사단급의 병력을 우선 증파해달라고 요청하면서 대가로 군 장비 현대화와 경제적 지원을 아끼지 않겠다는 제안을 한다. 참고로 이때 태권도교관단을 비롯한 비전투 병력 일부는 이미 베트남에 파견되 있던 상태였다.

즉 베트남 파병이 실제 이루어진 것은 결국 미국의 요구 때문이었으며, 외교, 경제, 국방의 상당 부분을 미국에 의존하던 당시 대한민국 현실에 별다른 선택지가 없기도 하였다.[8]

또한 베트남 공화국의 시궁창스러운 실상을 알지 못한 그 당시 국민들에게 파병에 대한 명분은 충분했다. 남베트남은 어쨌거나 냉전기에 한국과 같이 반공을 표방하던 나라였고 당시의 남베트남 정부는 한국과 서로 대사관까지 두던 수교국이었던 것이다. 다시 말해 한국이 동남아에 '태극의 제국'(...)을 건설하기 위해 파병한 것이 아니라[9], 외교관계 있는 동맹국에 원군을 보낸 것이다.

거기다 불과 10여년 전에 북한의 공격 때문에 말 그대로 헬게이트가 열릴 뻔 하다 유엔군의 도움으로 겨우 살아난 한국 국민들은 자연스럽게 남베트남인들을 북베트남 공산 도당에게 핍박당하는 선량한 민주주의자로 보았다. 정부와 대다수 언론 매체들이 이런 방향으로 여론을 유도하였다. 10여년 전에 자신들 스스로가 북한에게 당해봤으니 안 그러는게 이상한 것. "미국이 우리를 한국전쟁때 도와줬으니 이제 우리도 미국을 도와주자" 또는 "이제 우리나라도 다른 나라를 공산주의자의 야욕으로부터 지켜주자!"라는 주장이 자연스레 설득력 있게 받아들여진 것이다.
결론적으로 이런 저런 이유로 한국 국민들 모두가 한국의 파병을 정당하다고 믿고 있었던 것.

그런데 미군은 베트남전 와중 한국군의 참전에도 주한미군 병력을 빼서(...) 베트남으로 파견했다. 리처드 닉슨 정권에서 벌어진 일이었는데 일방적인 통보와 함께 7사단을 빼버렸고 주한미군 2만명이 감축되면서 주한미군의 수는 역대 최저인 3만 7천명으로 줄어버렸는데 이는 당시 월남에 가 있던 한국군 4만 6천명보다도 적은 숫자였고 이에 박정희는 격노하여 미국을 성토하는 담화를 발표하려다가 미국도 유신정권을 좌시하지 않을 것이란 미국 대사의 경고에 이를 철회했다.

2. 파병 부대[편집]

  • 배트남전 총사령부 주월 한국군사령부

  • 제9보병사단 백마부대

  • 수도사단 맹호부대

  • 건설지원단 비둘기부대

  • 제2해병여단 청룡부대

  • 해군수송전대 백구부대

  • 공군 제55항공수송단 은마부대

  • 제100군수사령부 십자성부대

3. 주요 전투 기록[편집]

4. 베트남전에 대한 평가[편집]

이미 일어난 베트남전에 한국군이 파병이 된 만큼 파월 한국군을 이해하고 평가하는데 있어서 베트남전에 대한 평가가 선행되어야 한다.

4.1. 베트남전 발발 당시의 평가[편집]

베트남 전쟁을 바라보는 두가지 관점이 있다.

첫째는 자주적인 통일 국가를 이루려는 베트남 민족과 외세(프랑스,미국 등)의 대결로 보는 구도로 북베트남과 남베트남 민족해방전선이 제기하였다. 애초에 베트남 전쟁의 시작이 프랑스가 변화된 국제정세를 무시하고, 베트남을 계속 식민지로 유지할려다가 시작된 것이고, 남베트남은 사실상 프랑스가 만든 괴뢰국가에 불과하였다. 더구나 프랑스가 디엔비엔푸 전투의 패배로 베트남을 포기하고 떠난뒤 남북간에 합의된 1956년 남북통일총선거를 남베트남 정권이 차일피일 거부하면서 남베트남의 입지가 매우 약화된 상태였다. 따라서 이 관점에 따르면 베트남 전쟁은 통일국가 수립을 위한 내전이며, 미국의 개입은 당연히 명분이 없다.

베트남처럼 식민지였다가 2차대전 이후 독립한 수많은 제3세계 신생국들은 당연히 여기에 호응하였다. 2차대전이후 식민지들을 포기한 서유럽 국가들에도 이런 관점에 동조하는 정치세력들이 상당하였다. 때문에 UN의 승인과 대다수 서유럽 국가들이 미국을 따라 참전한 한국전쟁과는 달리 미국은 베트남전에는 자신들의 서유럽동맹들을 참전시키는데 어려움을 겪었다.

둘째는 공산 북베트남자유 남베트남의 대결로 보는 것으로 당연히 남베트남과 미국이 강력하게 제기하였다. 냉전이 한참이던 시절 미국은 반공을 외치면서 전세계 각지에서 공산주의와 조금이라도 연관이 있다면 무조건 적대시하였다. 이때문에 프랑스가 디엔비엔푸 전투에서 참패하고 베트남을 포기하자, 미국은 도미노 이론을 내세워서 개입하기 시작한 것이다. 이 관점에 따르면 미국의 개입은 자유 진영을 수호하고, 아시아 공산화를 막기위한 정당한 행동이다.

실제 베트남 전역이 북베트남으로 통일된 이후, 인접국인 라오스캄보디아도 공산화되었기에 도미노 이론이 맞아떨어졌다는 견해도 있다. 물론 미국의 개입을 잘못된 방향으로해서 도미노를 부채질했다는 견해도 있다.

4.2. 현대의 평가[편집]

베트남전 자체가 워낙에 복잡한 전쟁이기에 평가를 내리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그를 드러내듯, 베트남전에서는 그 어떤 국가도 일방적으로 침략국으로 규정받지 않았다.

현대의 관점에서 보자면 미국이 베트남의 혼란한 상황에 충분한 지정학적, 역사적 검토 없이 이념논리로 개입을 결정한 것은 실책으로 평가받는다. 미국은 북베트남이 중국과 프랑스를 경계한다는 것을 간과하고 북베트남을 포섭하기 보단 배척하기만 하였다. 또한 북베트남에 대한 군사적 우위를 맹목적으로 믿고 갈등의 외교적 해결보다는 군사적 해결을 선호하였다.[12]

그렇기에 베트남전에 대한 가장 객관적인 평가는 냉전 체제의 대리전으로 빚어진 비극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전쟁으로 수많은 남북 베트남 국민, 미군, 한국군을 포함한 동맹군이 사망했으며 그 후유증은 부분적으로 아직까지 남아있다.

월남 파병에 대한 평가 또한 일방적인 피해자도 일방적인 가해자도 아닌, 그러나 결코 자랑스럽거나 모범적이지는 않은, 불합리한 냉전의 시대에 일어난 일이라 판단할 수 있을 것이다.

5. 파월 한국군에 대한 긍정적 평가[편집]

당시 한국군의 대우는 보급과 수당 면에서 미군은 물론이고 다른 참전 연합국에 비해서도 좋지 않았으며, 비슷한 경제사정이었던 태국군보다도 낮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군의 9대 1을 쌈싸먹는 25대 1의 사상자 교환 비율을 비롯하여 파병 한국군의 전과는 놀라운 수준이었다. 전쟁 후반기의 작전에는 100대의 1의 교환비를 보여주는 기염을 토하기도 했다..[13] 실제로 베트콩 및 북베트남 내부에서 '확실히 이긴다는 보장이 없을 경우 절대로 한국군과 싸우지 말고 피하라'는 식의 명령을 내린 정황도 꽤 되며 동맹군들 사이에서도 유명한 편이었다. 장비나 신체조건 상으로 보면 미군보다 활약이 떨어져야 정상인데, 도리어 정반대 결과가 나왔기 때문.

한국군이 잘 싸운 이유는 첫째로 대한민국 역사상 최초의 해외 파병이라 많은 준비를 해서 갔고,[14] 둘째로 해방 이후부터 빨치산 토벌등으로 대게릴라 전투에 어느정도 경험이 있었다.

때문에 파월 한국군은 민심 확보를 최우선 과제로 두고 대민작전과 지원에 큰 관심을 기울였는데, 그로 인해 전투병으로서의 명성보다도 이 분야에서 더 널리 알려졌다.[15] 게릴라 전은 민심이 기반이 되어야 성공할 수 있는데, 한국군의 경우 민심이탈부터 방지하였으므로 한국군이 베트공을 상대로 전공이 높았던 건 다 이유가 있었다.

한국군은 참전기간 중 대민진료 352만3,364명, 식량1만9,640톤, 의류 46만1,764점, 농기구 6,406대, 가옥 및 교실 3,319동, 교량 132개, 도로 394㎞, 태권도 보급 90만2,060명, 경로 및 어린이 잔치 6,848회, 연예 공연 2,304회 등 평정사업과 동시에 많은 대민 사업을 펼쳤다.

한국군은 원래 구식 무기인 M1 개런드를 들고 있었으나 채명신 장군이 미군 지휘부를 설득한 끝에 미군이 막 보급받던 M16을 약간 받아온 것을 시작으로 몇년이 지나고 나서는 전군이 M16 등의 신예 미군 병기로 무장하였다. 따라서 병사 개개인의 화력에서도 미군에게 뒤떨어지지 않았다. 거기다가 사령관의 제대로 된 지휘 덕에 지구방위대 미군보다도 오히려 더 잘싸우는 이상한 결과가 나와버렸다.

주월 한국군은 게릴라 소탕, 대민지원, 영내수비등의 임무가 많았다. 따라서 월남전에서 한국군이 부수적인 역할만 한 것이 아닌가하는 의문을 가질 수 있다. 하지만 사실 게릴라 소탕이라고 하는게 헬기로 공중강습하고, 미군의 빵빵한(...) 화력지원에다가 포위망도 갖춘 정교하고 대대적인 작전인데다가 영내수비란 것도 따지고보면 두코 전투짜빈동 전투처럼 스케일이 크기도 하다.

또한 본래 점령전이 아닌 베트남에서는 전장 환경(지상전 한정)상 게릴라 소탕, 대민지원, 영내수비가 주가 될 수 밖에 없는 전장이었다. 특수부대의 월경 작전도 따지고보면 정규전을 치르려는게 아니라 게릴라 활동을 차단시키려고 하는 목적에서 이뤄졌다. 구정 공세도 게릴라전의 스케일이 남베트남 전역으로 확대된 것이고, 케산 전투도 영내수비가 엄청나게 큰 판으로 벌어진 것이다.

게다가 한국군은 베트콩 이외에도 두코 전투, 안케패스 전투나 짜빈동 전투 등 월맹 정규군(북베트남군)과 여러차례 교전한 끝에 전과를 올림으로서 실제 정규군을 상대로도 충분히 활약할 수 있었다는 점을 입증해냈다. 그 외에도 주월 한국군은 독수리 70-1호 작전, 독수리 71-1호 작전, 백호 9~12호 작전, 홍길동 작전,등 월맹 정규군과 주월 한국군이 전투를 치른 사례가 아주 풍부하다. 그 중에서도 '짜빈동 전투'는 국군의 역사에 길이 남을 전투라 할 수 있다. 자세한 전투 경과를 보고 싶다면 이쪽으로.

따라서 주월 한국군은 미국으로부터 전폭적인 지원을 받는 환경 속에서 충분히 자기 가치를 드러냈다고 보면 되겠다. 비록 주월 한국군은 미국으로부터 지원을 받았고 실제로 그 지원을 토대로 승전을 거두었지만 어디까지나 전투를 치르는 주체는 한국군이었던 것이다.

한국군의 베트남전에서의 무용담은 군사정권하에서 과장과 왜곡된 것이라는 주장도 있다. 베트남전을 시찰한 미군 정치고문 제임스 맥이 주월미대사관 정치담당 참사관 니콜라스 손에게 보낸 해병대 청룡부대(2여단)에 대한 장문의 보고서를 그 근거로 드는데 내용은 다음과 같다.

  • 대한민국 해병대는 주요 전투에서 베트콩 등 적들에 대한 주요 군사행동을 주도적으로 취하기를 꺼렸으며 미군과의 제대로 된 작전연계를 펼치지 못하였다.[16]

  • 민간인 학살과 포로학살이 빈번하였으며 베트남 농민은 베트콩보다 한국군을 더 두려워하였다.

  • 암시장에 물건을 내다팔거나 물건을 훔치고 현지를 약탈하는등 도덕적 해이가 심각하였다.


보이다시피 한국군에 대해 전반적으로 부정적인 평가를 내려놓았다.

이에 대해 채명신 사령관은 다음과 같이 반박하였다. 다만, 암시장에서의 부정행위는 일부 인정했다.

  • 베트남전의 성격 규정에서부터 한국군에 독자적인 작전권 행사를 허용할지 여부 등 크고 작은 문제를 두고 주월미군과 주월한국군 사이에는 심각한 의견대립이 있었다.

  • 미군이 아시아문화권을 이해하지 못하는데다 게릴라전의 본질에 대한 이해가 부족했던 탓에 나중에는 한국군이 채택했던 전술개념 등을 전적으로 받아들이기도 했었다.

  • 해병대의 경우 적극적인 전투태세를 갖추지 못했다는 것은 말이 안 된다.

  • 오히려 참전 초기 성급하게 공격에 치중한 나머지 베트콩들의 매복이나 기습공격에 다수가 사망한 사건 등을 허위보고하는 사례도 발견돼 3명 이상의 적군을 추격할 때는 사령관의 허가를 받으라는 무리한 지시를 내려야 할 정도였다.


또한 이 평가는 제임스 맥이 해병 2여단 중 쿠앙남성 이남지역의 해병대에 대해서만 평가하고 있는 것이므로 모든 한국군이 이렇다고는 할 수는 없다. 그 외의 미국 자료들은 대체적으로 한국군의 군사활동을 긍정적으로 평가하고 있다.[17][18] [19]

그리고 암시장과 비리에 관한 관한 문제는 무기를 팔아먹는거 보다는 빈약한 지원 때문에 더 사오는 경우가 많았다고 한다. 당시 군수부대에서 근무한 한국군과 미군참전용사들에 따르자면 초반에 M16을 보급받지 않고 빈약한 M1 개런드나 카빈 소총을 받은 한국군은 암시장에서 몰래 무기를 사오는 경우도 있었고. 신형 소총을 더 보급받기위해 다른 부대에 빼돌려 버리고 전부 손실했다고 거짓말을 하고 보급을 더 받은 일화도 유명하다. 어차피 한국군은 베트콩을 주력으로 싸웠기 때문에 무기를 팔아먹으면 바로 적의 손에 들어가는데 개인이 무기를 팔 이유도 없었고 부대단위로 신형 무기를 다 팔아버리는 막장스러운 사태도 있을일이 없다. 그리고 가뜩이나 군기와 구타가 심한 1960년도 군대에 군인이 전쟁터에서 무기를 팔아버리면/잃어버리면 끝장인걸 누가 모르는가? 다만 씨레이션이나 텔레비전, 냉장고 등등 남은 것들을 군사들이 빼돌리거나 암시장에서 구입하여[20] 집으로 보내는 경우가 있기는 있었다. 엄밀히 말해서는 불법이 맞지만 베트콩들에게 무기를 팔아먹는 미친짓은 아니다, 그리고 당시 얼마나 한국이 가난했는지 생각을 해보면 어느정도 이해가 갈것이다.

한국군의 베트남전 사상자 비율이 1:24로 미국의 1:9보다 크게 앞선다는 것 역시 미국이 인정하는 사실이다.#

여기서 자세한 서술을 보자면

The ROKs very much favored small unit operations, aggressive offensive raids on isolated targets, offensive ambushes, especially at night, and, because of their martial arts expertise, they felt they had a distinct advantage in close hand-to-hand combat, which was most certainly true.

한국군은 소부대 작전과 고립된 표적에 대한 호전적인 공세적 습격, 공세적 매복, 특히 야간매복을 매우 선호했다. 무술을 사용 가능해서인지 백병전에 대해 압도적인 우위를 점하고 있다고 믿었으며, 이는 사실이었다.

They appeared to have a natural nose for picking up enemy weapons that were, as far as the enemy thought, securely cached away. Considered opinion was that it was good the Koreans were "friendlies."

베트콩이 안전하게 숨겨놓았다고 생각한 무기들을 찾는데 천부적인 재능이 있는 것 같았다. 한국군이 동맹군이었다는 것이 다행이라는 의견이 주류였다.

An analysis of the over-all Korean contribution to the pacification program leads to the conclusion that Korean combat forces had their greatest success with small unit civic action projects and security operations within their Korean tactical area of responsibility. Complete success eluded the Koreans, however, because of their insufficient coordination and co-operation, and the initial impression they made in dealing with the Vietnamese.

한국군의 담당 지역 안정화 작업을 전체적으로 분석하면 한국군은 작전 담당 지역에서의 소규모 대민지원 및 보안 작전에서 가장 많은 성과를 거두었다는 결론이 도출된다. 다만 한국군의 성과가 완벽하다고는 할 수 없으며, 이는 한국군의 내부조율 및 외부협력이 부족했던 점과, 현지인들의 첫인상이 좋지 않았다는 점에서 기인한다.

제임스 맥이 그렇게 폄하하는 해병대가 바로 1:24 사상자 비율의 주인공이기도 하다. [21]

During Operation VAN BUREN, one the Korean platoons of about 13 Marines wipes out an elite North Vietnamese Army (NVA) regiment. There are only two Koreans dead and more than 400 NVA soldiers dead. The Republic of Korea Marine Corps boasts a kill ratio of 24 to 1 in the Vietnam War.

Van Buren 작전중 한국군 소대들 중 약 하나인 약 13명의 한국 해병들로 구성된 소대가 정예 월맹군 연대를 섬멸했다. 해병들은 2명을 잃었지만 400명 이상의 월맹군 사상자가 났다. 대한민국 해병대는 1:24 사상자 비율을 자랑했다.

그리고 과장이라고 보기한게 힘든게, 오히려 한국군 전투부대는 미군들과의 교류가 많았고, 특히 미군 전투부대원들과 같이 작전을 펼친적이 많았다. 청룡부대 경우 여단규모라 담당지역을 이동하는 편이었다. 위험한 지역에 들어가서 베트콩을 소탕하고 다른 지역으로 이동하는 식으로[22][23] 싸웠기 때문에 지원이 많이 필요했고 그 지원을 미군들에게서 받았다. 그러므로 합동작전도 많이 있었고 개개인 전투병들과의 교류도 많았고 그들에게서 명성도 아주 높은편이었다. 특히 미해병대 항공함포연락반(ANGLICO) 인원들이 청룡부대 전투부대 중대마다 배속되어 수많은 교전을 같이 겪었고 짜빈동 전투에도 ANGLICO 미해병들이 두명이나 같이 있었다. 이들에 의하여 한국군 해병대와의 경험을 해외 베테랑 커뮤니티에 알리고 대부분 월남전 당시 한국 해병대의 긍정적인 평가는 여기서 비롯되었다고 할수 있다. 다시 말하자면 제임스 맥이 평가한 청룡부대, 특히 쿠앙남성 (Quang Nam)에 주둔한 부대는 미군들과의 교류가 수없이 많았고 오히려 그들의 평가는 아주 긍정적이다. 물론 맥의 평가를 무시할수 없지만 직접 같이 싸우고 작전을 펼친 전투병들과의 평가와는 정반대이다.

다만 무조건 승리한것만은 아니다. 공식적인 기록에도 남아있지만 실지로 한국군은 미군이나 월남군처럼 정규 월맹군 상대로 대규모 작전을 실시한 적은 별로 없고.[24] 연대-여단 규모 작전이 그나마 큰편이었다. 오작교 작전이나 홍길동 작전, 황룡 작전등 스케일이 큰 작전들도 있었지만 대다수는 소규모 교전과 매복이었다. 이중에서 큰 성과를 얻었지만 매복이나 부비트랩으로 손실을 잃은적도 꽤 있다. 이에 대해서 국방부는 승전보만 알리려고 어느 정도 피해를 입은 사례들이 있으면 덮어버리는 경우도 있어서 오히려 파월용사들의 수기로 가슴아픈 사례들이 밝혀진바가 있다.

예를 들자면 짜빈박 전투는 "투망 작전"의 한부분으로 해병대가 손실을 잃은 전투였지만 국방부는 언급을 하지 않고 작전이 그럭저럭 성과를 얻은 작전이기 때문에 작전 기간에 모든 전과만 언급하고 "부분적 성공"이라 칭하고 그 특정 전투는 넘기는 식이었다.

또한 오작교 작전에서 백마부대의 도깨비 11중대가 보초병이 조는 바람에 기습으로 큰 피해를 입었은 사건이나 맹호부대의 혜산진 1대대 2중대에 베트콩이 침투하여 막사에 수류탄들을 투척하여 많은 사상자가 발생한 사건이 있었습에도 불구하고 오작교 작전 자체가 큰 성공이라 전과만 홍보하고 다른건 싹 덮어버리는 면도 있었다.

안케패스 전투 경우는 한국군이 큰 전과를 올렸지만 사령부의 잘못된 판단에 의해 많은 이들이 희생되었다는 점도 참전용사들의 수기에 의하여 밝혀졌다.

흥미로운걸 쓰자면 미군참전용사들이 한국군을 바라본 시선이 독특하다. 당시에 군기와 구타가 심해서 당연히 지금의 시선으로는 가혹행위지만 미군 참전용사들은 "하드코어 하다. 우리도 저렇게 해보자."(...) 라는 말도 장교 사이에 돌았다고. 물론 한국 파월장병들은 지원자들을 거쳐서 뽑아내어서 당시에 한국에서는 꽤 정예로 볼 수 있고. 미군 경우는 후반기에 들어설때 징집병들이 많이 들어서서 생각보다 작전에 덜 적극적이었다는 말도 있었다.[25]

5.1. 파월 한국군에 대한 서방의 시선[편집]

자유 월남의 자유로운 미래를 위한 한국이 이룩해 온 크나 큰 공헌은 17년 전 미국이 한국에 심었던 신뢰와 도움이 헛되지 않았다는 확실한 증명이 되고 있다. - 리처드 닉슨, 1967년 12월 17일 -

노획한 베트콩 문서에 의하면 베트콩은 100% 승리의 확신이 없는 한, 한국군과의 교전을 무조건 피하도록 지시가 되어있다. 한국군은 모두 태권도로 단련된 군대이니 비무장한 한국군인에게도 함부로 덤비지 마라. - 타임즈, 1966년 7월 22일

월남의 모든 사람을 다 제쳐놓고 60만 한국군에게 전쟁을 맡겨 보는 것이 어떨까? 5만에 불과한 한국군은 적의 구정 공세 기간 중 전술 책임 구역 내에 침입한 적을 단 하루 만에 격퇴했다. 베트콩의 항불전쟁 이래 베트콩에 장악되어 있던 중부 해안 지대가 지금은 한국군에 의하여 완전히 통합되고 있다. - 미국 에반스빌 저널, 1968년 3월

월남에 있는 미국인들은 전투에 있어서나 평정사업에 있어서나 한국군을 최고로 높이 평가한다. 사실 한국군과 함께 작전을 수행해본 일부 미군들은 미군이 한국군의 방법(전술)을 배워도 좋으리라고 믿게 되었다. "마치 미국은 한국이라는 비범한 학생을 가르치는 선생이 된 거와 같습니다. 어느날 아침 교실에 와서 선생님 미국보다 학생인 한국군이 앞서 있다는 사실을 발견한 것과 같습니다."라고 한 미국 관리는 심각하게 말했다. - 뉴스 위크, 1967년 4월 10일

공산군이 38선을 넘어 남침할 당시 이 한국군은 지금의 월남군과 같았다. 그러나 17년이 지난 지금, 한국군은 얼어붙은 압록강을 떠나, 철원의 고지를 떠나, 그리고 인천항, 부산항을 떠나 수천만리 이역 땅에서 다시금 공산주의자와 싸우고 있다. - 옵저버, 1967년 5월 24일

한국군이 주둔하고 있는 중부지역은 가장 안전한 곳이다. 한국군은 아주 특수한 전술을 가진 적과 대치하고 지역을 지키기 위해 충분히 용감한 군인이다. 또한 지방 농민과 잘 어울리고 농사일에는 모도 심어주고 우수한 군의관은 대민 진료를 열심히 해주고 있다. - 월남 띠엔 반 신문, 1968년 2월 17일

한국군은 우군 피해에 대해서 15:1 이라는 비율로 적을 사살했으며, 프랑스와 월남이 20년간 시도하다 실패한 빈딩성의 늪지 해안으로 부터 적을 추격, 격파 시켰다. 기본적인 한국인의 특성으로 지적할 만 한 것은 불굴의 정신이다. 맹호, 백마, 청룡 용사들에 대하여 적이 조심하고 있다고 해서 이상할 것은 없는 것이다. 노획된 베트콩이나 월맹군의 문서에 의하며 한국군과는 가급적 접전을 피하도록 전 병사들은 명령 받고 있는 것이다. - 사이공 포스트, 1968년 3월 20일

만일 한국군이 전 월남을 장악하였거나 미군들이 "고보이" 교훈을 배울 수 있었더라면 월남전은 벌써 이겼을 것이다. 칠흑 같은 어둠 속을 96키로나 자동차로 달려도 총격도 복병기습의 기미도 전혀 보이지 않는다. 월남 지역의 그 어느 곳에서도 그와 같이 할자는 한국군 이외는 아무도 없다 - 영국 런던 타임즈

한국군의 전술과 미군 전술과는 중요한 차이가 있다. 한국군은 적으로부터 사격을 받으면 즉각 2개 내지 그 이상의 방향에서 공격을 가하여 베트콩이 도망칠 기회를 주지 않았다. 미군은 적으로부터 사격을 받으면 뒤로 물러나 포병지원을 요청하거나 공중폭격을 요청한다. 그 다음에 공격을 하게 되니 적은 이미 자취를 감추고 만다. - 미국 하원의 증언록에 실려있는 하원 국방위원장의 증언

"12년간 수백만발의 포탄을 쏘아대고, 수천명의 전사자를 냈음에도 불구하고 프랑스군과 월남군, 미군에게마저 실패와 좌절을 안겨준 공산군의 요새를 한국해병대가 단 두시간만에 점령했다, 대체 우리연합군에게 무엇이 문제였단 말인가?" -- 2시간의 전투결과보고는 단 세마디.. “목표제압완료, 아군피해 무, 생포한 적 압송중!!” - 르몽드

5.2. 인명 피해[편집]

중복으로 파병된 병력을 포함해 8년간에 걸쳐 비전투 병력까지 포함하여 투입된 병력은 30만 명이며, 이 가운데 5,000여 명 가까이 전사하거나 실종됐고[26] 7,000여 명이 부상을 당했다.

5.3. 참전용사 대우 문제[편집]

5.3.1. 이중배상금지[편집]

대한민국 최악의 악법중 하나라 평가받는다. 그래서 대법원[27]에선 당연히 위헌 판결을 내렸다. 그러나 10월 유신 이후 이 조항이 헌법자체에 들어갔고 민주화 이후에도 수정되지 않았고 때문에 법관들도 헌법 때문에 배상을 할 수 없는 상황이다#

5.3.2. 전투는 했지만 전투수당은 주지 않겠다[편집]

김우일(72)씨 포함한 베트남전 참전용사 30분은 2012년 2월 국가를 상대로 소송을 냈다. '당시 주지 않은 전투근무수당'과 '해외근무수당이 미군에 비해 턱없이 적었으니 미지급분도 달라'는 것이였는데 전투근무수당 청구의 근거는 당시 군인보수법 제17조였다. 이 법엔 “전시·사변 등 국가비상사태 때 전투에 종사하는 자에게 전투근무수당을 지급한다”고 명시되어있다.

참전용사분들은 “대한민국을 위해 전투에 참가했다면 ‘전투에 종사하는 자’에 해당한다”고 말했지만 정부는 “베트남전쟁은 대한민국의 전시 또는 국가비상사태에 해당하지 않는다”는 주장을 했다. 그리고 법원은 정부편을 들었다.

“‘전시’란 대한민국의 전시만을 의미한다”“‘대한민국이 주체가 되는 전쟁’ 또는 ‘대한민국의 국익을 위한 전쟁’으로 확대 해석할 근거가 없다” “베트남전 파병은 군사 원조” “이 전쟁으로 대한민국이 전시에 준하는 국가비상사태에 이르렀다고 볼 수도 없다”는 이유로 전투수당을 거부했다.

여기서 끝나지않고 “청구권이 인정되더라도 권리 발생 시점부터 5년이 지나 소멸시효가 완성됐다”고 판결했다. “2005년 8월 브라운 각서 등 베트남전 관련 외교문서가 공개된 이후에야 권리의 존재를 알게 됐고 이후 정부가 문제 해결을 약속해 소송이 늦어졌다”는 참전용사들의 주장은 무시당했다.#

다만 주의해야 할것은 여기서 많은 참전용사들의 의견이 나뉘어진다. 대부분 통일되었던 월남전우회가 갑자기 수많은 단체로 갈라진 이유들 중 하나.

5.4. 그 밖에[편집]

적군 시체가 아닌 무기를 통하여 공과를 확인했기에 일부에선 무기를 돈주고 사와서 적군 사살로 얻은 것으로 보고한 경우도 실제로 있었다. 그만큼 막장인 베트남에선 무기를 사는 게 어렵지 않았던 것이다. 다만 이것도 어디까지나 일부이며, 한국군이나 미군 헌병도 바보는 아닌지라 엄중히 조사했기에 걸리는 경우도 있었다고 한다. 물론 이게 대외적으로 알려지면 개망신이라 쉬쉬하면서 처벌했다고. 김형배의 베트남전 만화에서도 이걸 다룬 바 있다. 1968년에 참전했던 백마부대 소대장 말에 의하면 이러한 일 때문에 베트콩 시신을 끌고 오거나 사진을 찍어오라는 말도 안되는 지시까지 있었다고 한다.

6. 부정적 평가 및 논란[편집]

베트남 전쟁/한국군/논란 문서 참조.

7. 관련 인물[편집]

  • 채명신 - 초대 파월 한국군 사령관. 수도사단(맹호부대) 사단장

  • 박정희 - 당시 한국 대통령

  • 전두환 - 파견된 9사단 백마부대의 29연대장으로 복무[28].

  • 서경석 - 소대장 및 중대장으로 베트남에서 복무. 이때의 경험을 실감나게 그려낸 '전투감각'이라는 수기가 유명하다. 여기서 볼 수 있다.

  • 노태우 - 파월 수도사단(맹호부대) 제1보병연대 3대대장(현 수도기계화보병사단 제1기보여단 133기보대대[29])으로 파견된 백마부대의 연대장으로 복무.

  • 황석영 - 소설가. 해병 제2여단 소속으로 참전. 일반 전투병으로 복무하다가 후방으로 전출되어 군 수사대로 복무했다[30]. 이때의 경험을 바탕으로 , 무기의 그늘 같은 소설을 집필했다.[31]

  • 박영한 - 백마부대 29연대 보도병으로 참전. 머나먼 쏭바강을 집필, 후에 SBS에서 드라마화 됨.[32]

  • 안정효 - 백마부대 소속으로 참전. 훗날 안성기 주연의 영화로 제작된, 하얀전쟁 집필

  • 장태완 - 수기인 12.12쿠데타와 나에서 베트남전 경험이 수록돼 있다.

  • 남진 - 해병 제2여단 청룡부대 소속으로 참전. 당시 파병가서 죽을 고비를 여러번 넘겼다고 한다. 영화 '국제시장'에서 베트남에 돈벌러간 덕수를 구해주는 장면에서 출현한다. 한국의 엘비스 프레슬리라 불리는건 이런 이유도 있는듯.[33]

  • 허경영 - 1971년에 파병되어 나짱 지역에서 복무하다가 죽을 뻔했다고 한다.공중부양도 하시는 분이 딴지일보에 허경영과 같이 베트남 참전했던 용사가 수기를 쓰면서 허경영 이야기를 했는데, 당시 사단 법무참모부에 근무를 했으며 부대밖 파견근무를 나갈때 배낭에 양복을 챙겨가서 갈아입고 사진을 찍는 등(...) 기이한 행동을 했다고 한다.# 고로 당시 박정희의 비밀보좌관이었단 말은 당연히 구라.

  • 박정환 - 1967년에 태권도 교관으로 파병되어서 포로가 되어 생환한 경험이 있고 생존귀환의 한국군 포로의 산증인 출신이다. 그때의 경험담을 '느시'라는 제목의 수기집으로 집필했다.

  • 황정리 - 성룡과 함께 취권, 사형도수 등등 무술영화에 출연한 황정리가 맞다. 맹호부대 소속 태권도 교관으로 베트남전에 참전했다.

8. 기타[편집]

보통 영미권 국가들과 조금이라도 관계된 항목들은 당사국보다 영어로 작성된 항목이 가장 상세한 경우가 많으며 위키백과에서 해당 문서들은 일본어버전이 제일 자세하고, 내용도 과장되거나 한국군의 잔혹성을 부각하는 것이 많다. 물론 난징 대학살 같은 구 일본군의 전쟁범죄 관련 문서와는 완전한 정반대 태도. 개막장 극우들에게 완전히 점령당해 정신줄을 놓은 일본 위키백과의 슬픈 현실이다. 사실 애초에 일본 위키백과에서 역사나 정치 관련 항목들이 막장 수준으로 치우쳐 있다는건 알 사람들은 다 알기 때문에 역사 자료를 찾는데 굳이 그곳을 찾아갈 사람은 없다. 사실 어딜 가나 특정 사건에 직접 연관되어있는 국가들은 위키백과에서 중립을 지키지 못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객관적인 정보를 얻고싶다면 특정 사건이 왜곡된다고 해도 얻을 것도 잃을 것도 없는 중립적인 국가의 위키에 들어가서 구글번역기를 정성들여 돌리는게 좋다. 아니, 애초에 진지하게 객관적인 정보를 얻고 싶다면 위키보다는 여러 책이나 심도있는 기사를 비교 대조하면서 살펴보는 것이 좋다.

이 때 박정희 정권에 의해 제정된 악법이 그 유명한 군인에 대한 이중보상 금지 조항이다.[34] 지금까지도 수많은 참전자들이 이 법 때문에 고통을 받고 있고, 제1연평해전,제2연평해전 사상자가 보상금을 헐값으로 받은 대표적인 원인이 되기도 했다. 그렇기에 헌법이 개정되는 중에서 끊임없이 폐지 논란이 있었지만 결국 지금까지 존치되어 내려오고 있는 실정이다. 참고로 국회에서 이 법을 우회해서 보상을 주기도 한다.

한국 드라마 등을 통한 한류 열풍이 강한 곳 중 하나인 곳이 베트남이다. 그런데 2016년 인기 드라마인 태양의 후예 방영을 앞두고 논란이 베트남 국민들에게서 벌어지고 있다. https://www.youtube.com/watch?v=Yetvtde76BM 사실 베트남 정부나 국민들이 한국에 별 감정 없다는 서술들이 많은데, 한국과 마찬가지로 피해주장자들이나 인권단체, 진보단체 등에서는 강한 비판의식을 지닌 경우가 많다는 점은 알아두어야 할 부분이다. 베트남도 한국의 과거처럼 경제성장에 집중하는 개발도상국 단계에 있기 때문에, 그것을 가장 우선시할 뿐이다. 친미까지도 할 때는 하는 상황이니 말 다 했다. 하지만 남베트남에 거주하는 사람들은 오히려 "당시 북베트남이 우리를 점령했을때 우리 한테 한짓은 안말하고 한국이나 미국학살만 들먹이냐?" 라는 식으로 반응하는 사람들이 많다. 이들은 대부분 적화통일당시 피해를 본 사람들이나 그들의 후손들.

게다가 이 논란을 낳은 글은 베트남의 어떤 기자가 "만일 한국이나 중국에서 일본군을 관련한 드라마가 방영하면 어떻게 반응할 것인가." 라는 식으로 이야기를 했으나 위에 서술했듯이 달라도 한참 다르다.

[1] 해병대는 육군부대와 달리 덕헌터 얼룩무늬 군복을 착용했다[2] 사실 웃을수만은 없는게, 통신병저격수의 우선 목표 중 하나다.[3] 해외 커뮤니티에서도 미군이라고 아는 사람들이 아직도 많다. 다만 아는 네티즌들이 한국군이라 지적하고 링크를 걸어주면 한국군이 참전한 줄도 몰랐다는 반응이 따르기도 한다.<del>미국엔 자국이 베트남전에 참전했는지도 모르는 사람들이 있으니...</del>[4] 미국은 단독으로 월남전을 치루기에는 국제여론이 좋지 않았기에 명목상 연합군이 형태를 취해야 했던 상황이었다. 이에 미국은 미군부대를 철수시켜 월남에 투입하거나, 한국 측이 병력을 투입하는 대신 주한미군을 잔류시키거나 양자택일 중 하나인 상황이었다. 개발도상국인 한국 입장에선 1960년대에 경제적으로나 군사적으로나 북한에게 밀리는 상황이었고, 주한미군 철수는 국가안보상 엄청난 위협이었다. 군대 안보내고 국가의 존망을 걱정하는 상황 or 돈 받고 자국 군대참전+북한이 침공하려고 하면 미군의 즉시 투입(한미상호방위조약을 한국 측에게 유리한 개정)이었으니 대한민국은 후자를 택할 수 밖에 없던 상황이었긴 했다.[5] 원래 처음에는 수도사단만 보내려고 했는데 해병대측이 참전의사를 강하게 표명하고 파월 사령관 채명신도 해병대에 전투경험을 갖게 하는게 좋겠다는 생각을 하고 상부에 상신, 해병대의 파병이 이루어졌다. 9사단의 추가 파병은 미국의 요청에 의한 것이었다.[6] 누계합산으로 총 30만.[7] 이상 '새로 쓴 베트남의 역사', 유인선을 참고해 서술[8] 단순히 군부세력이 미국의 환심을 사기 위해서 우리 젊은이들을 용병으로 팔아먹었다는 식의 주장은 일부 사람들에게 카타르시스를 안겨줄지는 몰라도 당시 현실을 지나치게 단순하고 파편적으로 바라보는 것이다. 더구나 실제 파병이 이루어진 시점은 이미 박정희 정부가 선거를 통해서 출범한 이후이다. 다만 민주화운동으로 인해서 군부독재 정권이 대단히 취약했던 것도 사실이고, 이를 보완하기 위해서 미국의 요구 이상으로 적극적인 태도를 취한 측면도 분명 존재한다. <del>1개 사단을 요구했는데 2개 사단을 보냈다는...</del>[9] 다만 당시 생존해있던 독립운동가 겸 친일파 출신인 야당 여성 정치인 박순천이 베트남에 가서 한국군을 칭송하면서 "이 땅이 우리 땅이라면 얼마나 좋겠냐, 아니 이번 기회에 잘하면 한국이 차지할 수 있지 않느냐?"라는 말을 했으나 당시는 별다른 문제시되지 않았고 보수적인 정치가들도 매우 공감하는 뜻을 보였다고 한다.[10] "투망 작전"중에 일어난 전투이며 가히 한국 해병대에게있어 베트남전 사상 최악의 전투였다. 편찬연구소나 국방부에서도 그냥 "투망 작전" 아래에 묻어가는 식이다. 참전용사들의 증언을 모아보면 한국 해병대가 제대로 철거하지 않고 버려둔 중대 전술기지가 적에게 넘어가면서 엄청난 피해를 입혀버린 전투로써, 중대 단위로 시작한 작전이 연대단위로 확산되며 겉잡을 수 없이 악화되었다고 한다. 작전 자체도 매우 허술했다. 역설적으로 군대들이 지금처럼 극도로 최첨단화되지 않았던 당시에 중대 전술기지가 얼마나 효과적이었는지 다시 입증해준 셈.[11] 경계가 얼마나 중요한지 보여주는 사례. 백마부대 28연대 3대대 11중대가 베트콩의 매복에 중대전술기지가 뚫릴뻔할 아찔한 상황이였다. 당시 경계를 맡은 병장이 조는 바람에 베트콩이 쉽게 진입했고 다행히 기지를 사수했지만 많은 중대원들이 전사하고 부상 당했다. 오작교 작전중에 일어난 일이다. 짜빈박 전투와 비슷하게 국방부에서 오작교 작전의 성공 선전과 함께 묻어가는 식이었지만 참전용사들의 수기로 밝혀졌다.[12] 미행정부가 어떤 의사결정과정을 거쳐 베트남전에 참전하게 되었는지는 데이비드 헬버스템 저 '최고의 인재들'에 잘 나타나 있다.[13] (Stanley Robert Larsen and James Lawton Collins, Jr., 이주만 역, 『베트남 참 동맹군』, 국방부군사편찬연구소 군사참고 제24호, (서울: 국방부 군사편찬 연구소, 2008).[14] 초기 파월 병력 대부분은 각 사단에서 전투력 최우수자를 우선으로 뽑아서 파월사단 병력과 교체시키는 식으로 전투력 강화에 힘썼다.[15] 이라크 전쟁후에 파병된 자이툰 부대도 민사작전으로 유명하다.[16] 특히 이 평가는 많은 한국 해병대에서 같이 근무한 미해병대원들이 반박을 했는데, ANGLICO(미해병 항공함포 연락반 )대원들은 "처음에는 언어 장벽으로 대화는 힘들었지만 같이 생활하면서 서로를 믿게 되었고 지금은 그 누구보다 신뢰할 수 있는 친구들이다." Thomas Petri 나 Scott Leis등 대원들은 고국으로 돌아와서 청룡들과의 생활을 책으로 출간했다
.[17] 참고 : Allied Participation in Vietnam. Department of the Army(1985) 저자(Larsen, Stanley) [18] http://www.history.army.mil/books/Vietnam/allied/ch06.htm [19] 이 책은 미군의 공식 평가로 제임스 맥이나 다른 고문관의 평가까지 합쳐서 낸 종합 평가이다.[20] 육이오 이후에 한국에서 미군 생필 군수물품들이 암시장에서 팔린것과 비슷하게 베트남 암시장에서도 이러한 것들이 팔렸다.[21] 참고 http://www.usarpac.army.mil/history2/history_jan.asp [22] 캄란, 투이호아, 추라이, 호이안[23] 평정 후 맹호부대나 백마부대에게 인계되는 식이 많았다. 예를 들자면 푸옌성과 칸호아성은 청룡부대가 이동 후 백마부대의 담당지역이 되었다[24] 있긴 있었다. 안케패스 전투 등등[25] 특히 민간인 시절 반전운동을 많이 했던 학생이면 더더욱.[26] 이 중 일부가 실제로는 포로인데 전사자로 처리되었다는 주장도 있다.[27] 대판 1971.6.22, 70다1010[28] 상관들에게 안좋은 소리를 많이 들었다 자세한것은 전두환 항목 참조[29] 강재구 소령이 있던 그 부대이다. 재구대대[30] 누나 애인 빽 덕분에 뒤로 전출될 수 있었다는 이야기도 있다. 하지만 전출되기 이전까지 황석영은 전방에서 근무했으며 전투를 치렀던 경험도 있고 그 때문에 PTSD를 앓기도 했다.[31] 여기서 탑은 조선일보 신춘문예 당선작. 베트남 인민들의 토템을 두고 주인공이 속한 부대가 베트남 민족 해방전선과 교전을 벌인다는 내용인데, 비슷한 내용이 논픽션인 그린베레에도 실렸다. 다만 이쪽에서는 미군이 전투를 벌이며 토템을 두고 민족전선과 전투를 벌인다는 단편적인 요소만 빼면 별 다른 유사성이 없다.[32] 쏭은 강을 일컫는 베트남어다. 쏭바 또는 바 강이라 해야 함. 쏭바강은 역전 앞식의 중어 반복.[33] 엘비스 프레슬리는 베트남에 파병간 적이 없다. 1958년부터 1960년까지 주독미군 부대에서 근무했다.[34] 정확히는 군무원과 경찰도 해당되며 직무 중 죽거나 다쳐도 국가에 손해배상을 할 수 없고 법정보상금만 받을 수 있다는 제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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